김관도(성곤)
김관도(성곤)

[원불교신문=김관도] 철없이 살던 내가 원불교를 만나 철이 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원기62년(1977)의 일이다. 고려대학교 4학년 때 유신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제적을 당한 후 여러 어려움을 겪다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나도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연세대 신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큰 의심이 생겼다. 불교 신자로 살다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님을 비롯하여 예수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디에 계신가? 신학에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니,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도 당연히 하나님은 계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 뒤 나는 불교에 심취하여 강원도 월정사에서 3천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창작과 비평〉이라는 책에서 ‘조선불교혁신론’을 읽게 되었고 그 글의 저자가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원불교가 영광에서 시작된 신흥종교라는 말을 듣고 사이비 종교 아닌가 생각되어 잠시 원불교를 멀리 하였다. 그러다 1977년 여름날 집안 청소를 하다가 할머님의 위패함 아래서 우연히 〈원불교 교전〉을 발견하였다. 알고 보니 할머님의 장례식을 친척의 소개로 원불교식으로 치렀고, 그때 교무님이 교전 한권을 놓고 가신 것이다.  

생각해보니 불교나 기독교나 모든 종교는 다 시작할 때는 신흥종교 아닌가? 그래서 신흥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교전을 끝까지 읽다가 전망품 13장에 모든 종교가 다 한 아버지의 자녀와 같아 인류가 철이 들면 모두 한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소태산 대종사님 말씀에 크게 감동하였다. 내친김에 익산 총부를 찾아가 입교를 결심하고 그 뒤 원남교당을 다니게 되었다.   

한때 목사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전무출신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여 얼마 후 원광대학 교학과를 찾아 갔으나 데모로 제적당한 학생은 편입학이 안된다는 말에 낙심하였다. 고민하다가 마침 미국시민권을 딴 큰 형님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가 템플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다. 10년 동안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세계 여러 종교를 공부하며 소태산 대종사님 말씀대로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한 길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갖게 되었고 평생 동안 종교평화운동에 몸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귀국 후 당시 경산 장응철 학장님의 배려로 영산대에서 종교학을 강의하며 한편으로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사무총장을 맡아서 한국의 7대 종단과 교류 협력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지금 교단에서는 종교연합(UR)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죽기 전에 대산종사님의 염원대로 금강산에 세계종교평화센터(UR본부)의 기초라도 닦아놓고 죽어야겠다는 서원을 해본다.   
 

“출가하려는 그 마음으로 출마하여 
도(道)의 정치를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종교평화운동을 하던 중 1996년 봄 뜻하지 않게 민주당으로부터 아버님의 고향 전남 여수에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나는 영산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도를 깨치려면 결국 출가해야된다는 생각에 집착했었다. 내 나이가 당시 44세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내가 갑자기 출가한다고 하니 우리 처는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지 아이들도 어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항의를 한다. 그러나 착실한 원불교 교도였던 장모님의 설득으로 우리 처의 합의 도장을 겨우 받아 출가 지원서를 작성하고 교단에 제출하려는 순간 민주당에서 출마 제의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김대중 총재의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도 당선된다는 시절이라 슬그머니 명예욕이 생기며 출가하느냐 출마하느냐 하는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되었다. 

결국 고민 끝에 당시 좌산종법사님을 찾아갔다. 당연히 종법사님은 출가를 권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종법사님께서는 “불법의 대도가 반드시 출가에 있지 않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의 길을 열어놓았다. 모두가 깨닫겠다고 출가한다면 정치와 경제는 누가 담당하겠냐” 하시며 “출가하려는 그 마음으로 출마하여 도(道)의 정치를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듣고 보니 그 말씀이 옳은듯하여 출마하여 이후 4선 의원과 여러 공직을 맡게 됐다. 전적으로 좌산상사님의 지도 덕분이며, 새삶회 우산 최희공 종사님의 조언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하지 못한 숙제가 하나 남았다. 좌산상사님께서는 필자가 정치를 시작할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도와 한반도 평화통일에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좌산상사님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분단을 가슴아파하시며 일구월심 통일을 기원하고 계신다. 지금 우리 한반도는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로서 같은 민족끼리 교류는 커녕 엄청난 무기로 서로를 겨냥하고 협박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인들은 우리 한국인을 코리안이라고 부른다. 코리아는 고려(高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나왔고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코리안은 아름다운 민족이라는 뜻인데 과연 우리는 지금 그 이름값을 하며 살고 있는가? 

이제 내 나이 70이니 수양길에 들어설 나이다. 그러나 아직은 건강하고,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 좌산상사께서 주신 평화통일의 숙제를 조금이라도 해놓고 죽어야겠다. 대산종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금강산에 세계종교평화센터의 기초라도 닦아 놓으면 남북관계도 풀리고 UR도 만드는 일타쌍피 아닐까? 9988234라는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평화운동하다 2~3일 염불하고 평화롭게 죽는 서원을 해본다. 뜻있는 동지들의 동참을 기다린다.

/종교연합추진위원장ㆍ역삼교당

[2022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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