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삼 교무
박근삼 교무

[원불교신문=박근삼 교무] 교단개혁의 수많은 과제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법위등급 제도의 정상화를 꼽을 것이다. 

교법정신의 훼손 바로 잡아야
첫 번째, 지금의 개혁은 우리 교단이 단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법정신의 훼손을 바로 잡자는 데 있다. 교법정신 훼손의 가장 근원을 쫓아가 보면 역시 법위등급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배워야 할 사람과 가르쳐야 할 사람의 변별력이 없기 때문에 교리에 대한 인식이 중구난방이다. 

출가해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면 나이 많고, 경력 많고, 직위가 높으면 모두 스승으로 여기고 문답을 받아야 하는 분위기다. 그 사람의 진짜 법위와 관계없이 어른이면 무조건 옳다는 전제가 이미 성립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법위등급이 변별력이 없고, 법위가 나이와 경력과 직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법위가 나이와 경력과 직위에 있는 것인가? 나이와 경력과 직위라는 세속적인 가치 판단과 법위가 하나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전>의 법위등급을 한 번이라도 정독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지금의 법위 제도는 전혀 교법적이지 않고, 본질 없는 행정편의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법위등급 제도가 <정전>의 내용을 분명하게 구현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누구도 교단의 비법적 요소에 대해서 당당히 말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교법의 실천을 말하려면 먼저 법위를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의 개혁은 
주세불의 본의를 바로 세우는 일,
법위사정 개선의 문제는 제1의 개혁과제

두 번째, 변별력 없는 법위사정으로 교단의 인재풀이 엉망이 되어 있고 그래서 대중들이 지도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된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도부를 형성하고, 그분들이 교단의 최고지도자를 선출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교단이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근무하면 수위단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세 번째, 일원상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는 분들이 상전급이 되고 항마위가 되고 출가위가 되는 상황에서 교단의 교법 이해 수준이 현저하게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법을 설파할 책임을 가진 위치에 계신 분들의 메시지가 잘못 되거나 유치해지면 우리 교단의 내적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외적으로도 교법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교화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내실 없는 교화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지금의 법위등급 제도는 우리의 내적실력을 하향평준화 되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 지금의 법위제도는 공부할 필요가 없는 교단을 만들었다. 공부하지 않아도 연차가 되면 법위는 무조건 누구나 올라간다. 다만 근무년도와 사업성적에서 법위의 차이를 만들 뿐이다. 그래서 건물을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큰 교당에서 근무하고, 총부에서 높은 직책을 맡지 않으면 높은 법위를 얻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높은 법위를 얻기 위해서는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 줄을 잘 서서 좋은 인사 받고, 교도들이 떠나가든 말든 무조건 건물 많이 올리면 법위가 올라가니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실력이 없어지고, 실력이 없어지니 본질을 지키지 못하고, 본질을 지키지 못하니 세속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에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력 없이 세속에 흐른 사람들이 세속에 흐른 판단으로 교법을 해석하니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법위가 행정에 편입되면 본질을 구현하지 못하고 행정편의와 눈에 보이는 형평성만을 따지게 되어서 법위사정의 본질이 왜곡된다. 항마는 신중하게 줘야 한다면서 결국 일기 쓰고 훈련 받으면 항마를 준다는 것이다. 전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단지 행정적 과정을 추가한 것뿐이지 않은가? 정말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주세불의 본의 바로 세우는 법위등급
“나도 출석을 잘했는데… 나도 저 사람과 같이 교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왜 나는 안 올라갔지?”라고 교도가 물으면, 교무는 정기훈련에 불참이 있어서 그렇다는 원칙적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저 사람이 교법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더 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교도는 아마도 억울해서 난리가 날 것이다. 

그 교도의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 없는 법위 제도가 그런 판단을 하게 만든 것이다. 법위를 너무 마구잡이로 남발했다. 그래서 나는 왜 안주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법위사정의 진실이다. 

우리가 왜 개혁을 외치는가? 교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단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제의식조차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혁신의 움직임을 마치 권력을 바꾸려는 쿠데타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본질을 볼 생각은 안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점잖치 못한 인성을 지적하며 기를 꺾으려 한다. 마치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을 놓고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는 못할망정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당신이 건드려서 더 죽게 만든다. 아무 문제 없는 사람을 왜 병자 취급을 하느냐”고 소리 지르며 싸우고 있는 격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우리의 개혁은 권력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의 직위를 교체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제도 몇 가지 손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주세불의 본의를 바로 세우고, 이 세상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그래서 필자는 법위등급의 본의를 살려 법위사정을 개선하는 문제를 제1의 개혁과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남광주교당

[2022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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