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이란 용어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한쪽에서 ‘대중의 뜻’을 표명하면,  다른 쪽에서 ‘그 대중이 누구냐’고 따져 묻는다. 딱히 정해진 답이 없기에 우물쭈물,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차 강조된다. 마치 정치인들에게 ‘국민의 뜻’이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듯, 종교가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대중의 뜻’이 절대적 힘을 갖는다.

대중은 ‘모든 사람’을 지칭함과 동시에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을 일컫기에, 국민과는 달리 ‘무조직 집단’에 가까워 그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그러기에 ‘수동적, 감정적, 비합리적인 특성을 가진다’고도 표현한다. 어찌 보면,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대중은 늘 침묵하는 듯 보이기에 그 흐름을 읽어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론 정치인들이 국민을 팔아 권력을 잡는 수단으로 이용하듯 대중 역시 선동가들의 주의주장을 관철하는 수단으로는 꽤 용이한 면이 있기도 하다. 이때의 대중은 국민과 마찬가지로 그 목적을 달하면 이내 잊히거나 내팽개쳐지기 일쑤다.

대중의 뜻에는 늘 혼란스러움이 잔존한다. 이쪽의 대중과 저쪽의 대중이 상반되기도 하고, 그 뜻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 전체성보다는 개별성의 성격을 띠거나 보편성 보다는 특수성이 강해 왜곡이 있음에도 대중이란 이름으로 쉽게 포장되는 경향도 있다. 이것 역시 대중이란 모호한 경계선 때문이라 보아진다.

원불교 경전에서 <정전>과 <대종경>에 걸쳐 ‘대중’이란 명칭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단어 중 하나다. 특히 교단 초창기 소태산이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혁신하려 한 것은 지금껏 원불교의 정체성이 되고 있어 그 의미가 더 크다. 또 소태산의 모든 설법은 일부 소수인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모든 대중을 상대로 설했음을 <대종경>에서는 누차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대종경> 부촉품 19장에 바탕하면 ‘대중은 곧 소태산의 법을 반가이 받들어 실행하는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스승이 법을 새로 내는 일과, 제자가 그 법을 받아 후래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나, 후래 대중이 그 법을 받들어 실행하는 것을 삼위일체로 표현하고 있어서다. 그러기에 ‘대중의 뜻을 무시하는 것은 곧 천의를 어김’(요훈품 39장)이 되는 것이고, ‘대중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은 곧 하늘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인과품 23장)이라며, ‘대중의 공의를 얻어’(변의품 38장)야 한다고 말씀했다.

근래 교단 최고 지도자들도 때를 만나면 어김없이 ‘대중의 뜻이 종명 보다 우선’이라거나 ‘종명 보다 공명이 먼저’라는 원칙을 밝히기도 했다. 원불교의 대중은 이처럼 하늘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대중의 이름을 거론함에 있어 신중하고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2022년 7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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