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을 영춘헌으로, 사무실을 구정원으로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 총부를 건설해 운영할 당시는 사회적으로 백백교(白白敎) 사건이 발생해 종교탄압이 극심할 때였다. 당시 백백교 사건은 회금 운영과 남녀 규범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난 사이비 종교의 사회문제였다. 불법연구회는 일정의 탄압을 받고 있었으며, 사회문제들과 관련해 의심의 여지를 갖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처음 조실로 금강원을 사용했는데, 금강원은 총부 내에서도 제일 깊은 곳이었다. 또한 가까이에 있던 꼭두마리집은 부인선원과 식당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가 머무는 조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신영기는 자신의 사가(현 구정원)를 교단에 희사하고 익산 시내로 이사를 했다. 신영기가 사가를 교단에 희사할 즈음에는 대산종사의 가족이 이곳에 세 들어 살고 있던 때였다. 교단에서는 소태산 대종사의 조실을 옮겨야 했기에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영춘헌(구종법실)이 조실로 사용하기에 적합해 조실을 영춘헌으로 옮기기로 했다. 문제는 사무실로 사용하던 영춘헌을 조실로 쓰게 될 경우, 총부의 일을 관장하던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구정원 옛 모습.
구정원 옛 모습.

이에 대산종사의 정토였던 이영훈 선진은 “이 집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대산종사에게 말했다. 대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가 그 같은 일을 보고해 의견을 구하라고 했으며, 소태산 대종사는 양하운 대호법(소태산 대종사의 정토)을 불렀다. 

당시 양하운 대호법의 가족은 정신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방이 3개였다. 그 중 방 하나를 대산종사의 가족에게 내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하운 대호법 가족이 방 하나를, 이영훈 선진 가족이 방 하나를 사용하게 됐다. 또한 나머지 방 하나에는 박길선(주산 송도성 종사 정토) 종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일로 소태산 대종사와 주산종사, 대산종사의 가족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생활하게 된다. 법통을 이어가는 3대의 종법사 가족과 친인척이 방 한 칸씩을 쓰고 ‘한 지붕 세 가족’의 인연이 된 사례를 어느 종교사에서 볼 수 있을까. 이로써 영춘헌은 조실(구종법실)이 되고, 신영기의 사가는 사무실(구정원)이 됐다. 

구정원의 일화 중 많이 알려진 일화가 하나 있다. 주산종사는 당시 교정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신문을 받으면 보던 사무라도 그치고 읽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네가 소소한 신문 하나 보는 데에 그와 같이 정신을 빼앗기니 다른 일에도 혹 그러할까 근심되노라”하며 주의를 줬다. 하고 싶은 데에도, 하기 싫은 데에도 끌리지 말고 항상 정당한 도리만 밟으라는 가르침이었다. (〈대종경〉 수행품 20장)  
 

정신원 옛 모습
정신원 옛 모습.

[2022년 7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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