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천주교·불교·증산도·원불교 등 성지의 땅
종교는 민중의 3生, 생명·생활·생업에 도움돼야
유구히 흘러온 개벽 사상과 신종교 운동의 젖줄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지평선의 땅, 호남평야의 중심,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로 익히 알려진 김제. 하지만 그곳은 생명의 땅, 변혁의 땅, 운동의 땅이기도 하다. 불교의 금산사, 천주교의 수류성당, 기독교의 금산교회, 증산도·원불교 등 여러 종교의 성지가 모여있는 곳. 그곳으로 다섯 번째 답사를 떠났다. 이번 답사에서는 6월 18일 이종희 선생 생가, 구미란 전투지, 원평 집강소, 원불교 원평교당, 학수재, 수류성당, 금산사를 방문했다.
 

형식 벗고 ‘의(義)’ 쫓은 행동가들
답사단은 동학 원평취회가 열렸던 원평천 근처 이종희 선생 생가를 먼저 들렀다. 이곳을 들른 이유는 바로 그의 행보 때문이다. 이종희 선생은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원이다. 망명 전 그는 원불교의 조송광 선진(불법연구회 2대 회장)과 함께 동학군으로 활동하며 끈끈한 동지 관계를 맺었다. 이후 동학혁명이 좌절되자 조 선진과 함께 민족학교와 야학교를 운영한다. 그 다음 조 선진은 기독교에서 또 원불교로, 이종희 선생은 망명 후 무장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다. 이종희와 조송광, 두 사람은 형식적인 틀에 갇히지 않고 움직였다. 민중을 구제하고, 새로운 역사를 열 수 있다면 기독교·동학·원불교를 가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답사단은 현대 종교의 위기, 종교혐오현상에 대해 ‘민중의 마음을 구제하고 함께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종교들의 행태를 짚으며, 민중의 3生, 즉 ‘생명·생활·생업’에 바탕되고 도움 주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두 인물을 생각하며 집강소로 향했다.
 

‘동록개의 꿈’, 원평 집강소
원평 집강소는 백정 출신 동록개가 동학 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 ‘평등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희사한 건물이다. 이후 불법연구회의 출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전국에 설치된 53개의 집강소는 농민들 스스로 직책을 맡아 지역을 다스리는 역할을 했다. 이곳은 한반도 민주주의·민중 자치의 기원이며 민중의 자율성·자립력·자주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이곳에서 박맹수 총장(원광대학교)은 “선천·전근대 시대는 영웅과 지배층이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새 시대 후천에는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 이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상대를 대접하며 만들어가는 시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또 그 이야기를 간직하고 담론화할 수 있는 곳이 원평 집강소다. ‘평등 세상’을 꿈꿨던 동록개의 꿈을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벽종교답사단이 원불교 원평교당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개벽종교답사단이 원불교 원평교당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제3의 길 찾아 나선 이들의 귀의처
뒤이어 원불교 원평교당을 찾은 답사단은 ‘원평’이라는 지역에 갊아있는 에너지와 원불교의 역사를 짚어갔다. 이 자리에서는 원불교와 독립운동에 관한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일제 강점기 불법연구회는 준독립운동단체로 감시를 받았었다. 특히 망명이나 자결·은둔 대신 국내 활동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은 종교에 귀의해 제3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소태산 대종사가 활동할 당시 제자 중 15~20여 명이 독립운동가 출신들이란 기록도 발견됐다. 조송광 선진 역시 3.1운동에 참여, 지역의 인연들을 뒷바라지했다. 박민영 박사(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는 “일제강점기 당시 불법연구회 총부에 주재소가 있던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상주 동학교당에도 주재소가 있었다. 이는 집중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내가 마지막 가는 길이 이 길이다”
답사단은 이어서 한국 최초의 교우촌이자, 전국 최다 18명의 사제와 21명의 수도자를 배출한 수류성당을 방문했다. 수류성당의 이종승 미카엘 성지사무장이 수류성당의 역사를 전해줬다. 1895년에 설립된 수류성당은 당시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금산면)에 자리를 잡았다. 옛 건물들은 한국전쟁 직후 1950년에 한 차례 소실됐지만, 1959년에 신자들의 힘으로 복구한 저력이 있다. 이 사무장은 천주교 신앙인의 정신을 이야기하며 한 신자의 이야기를 전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신자에게 “집에서 기도하시라” 하자, 그 신자는 “내가 마지막 가는 길이 이 길이다” 했다고. 이 사무장은 “죽어도 하느님의 성전에서 죽겠다는 신앙심과 결의를 보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수류성당의 깊은 역사와 신자들의 이야기에 담긴 저력에 답사단은 옷깃을 여미며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정신적메카' 금산사의 의미와 현대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정신적메카' 금산사의 의미와 현대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민중의 어머니 절, 금산사
국내 최대의 미륵불이 있어 유명한 금산사. 기독교의 메시아 같은 역할의 미륵불은 고난과 고통에 헤매는 중생의 희망이다. 미륵 사상은 통일신라부터 근현대를 관통한다. 또 모악산은 ‘민중의 어머니 산’으로, 그 품에 금산사는 ‘민중의 어머니 절’로 개벽 사상, 신종교 운동의 젖줄이자 생명줄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금산사 외에도 불교는 너른 품으로 많은 종교인을 안아줬다. 천주교는 광주 천진암, 동학의 수운은 남원 은적암, 해월은 익산 사자암·공주 가섭암에 기거하며 신종교 운동·개벽 사상을 확장했다. 증산 강일순은 죽음을 앞두고 ‘나를 다시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했고, 소태산 대종사도 금산사를 찾아 송대에 머문 적이 있다. 이를 두고 박 총장은 “금산사는 그 시대 일종의 정신적 메카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한 수많은 종교와 종교인들, 민중의 에너지는 김제 모악산자락에 응집됐다. 그리고 이 개벽 사상과 신종교 운동의 젖줄은 유구히 흘러와 효율·발전만을 추구하는 서구 일변도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보여준다.
 

[2022년 7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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