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전만 보면 아픈 것도 잊는 일평생 닦아온 공부길
사람이 아니라 천사 같이 보였던 불법연구회 선생님들
“혼자 키우는 게 아니라 법신불 사은께서 도와 키우신다”

기도와 공부로 살아온 일평생
그는 매일 기도를 한다. 젊을 때부터 기도에 재미를 붙였다. 정토회관이 이리교당에 있었을 때, 100일 기도를 시작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교당에 가지 않아도 가정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다 ‘모든 것이 내가 잘못하고, 내가 지은 것이구나. 이 회상 만났을 때 빚 다 갚으라는 신호구나’ 하는 감응을 얻기도 했다. 정토회(正土會, 남자교무 부인 단체)의 원로로 후배 정토들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는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林陀圓 金道珍·95)를 만났다.

또 그는 교무들의 지도를 잘 따르는 모범생이다. 고원선 교무가 정토회관에 근무할 때 소태산 대종사 십상과 그 내용을 외우는 숙제를 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을 넘었을 때다. 장녀인 이성전 원로교무는 “저 연세에 저걸 외우실 수 있을까 했는데, 그것을 다 외우시더라”며 어머니의 공부심에 자부심을 보였다. 

또 지난해에는 ‘염불십송’을 외우는 숙제가 있었다. 그는 94세의 나이로 염불십송을 외워 매일 기도 때 독송한다. 김 원로정토는 “혼자 있을 때 교전 사경을 해요. 나이도 많고 고생도 많이 해서 안 아픈 곳이 없고, 눈도 잘 보이지 않지만, 교전만 들여다보면 아픈 것도 잊고 3~4시간을 앉아서 써요. 그 덕에 명도 길게 사나 봐요”라며 기도와 공부로 살아온 일평생을 담담히 회고했다.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

‘신랑 될 사람이 불법연구회 사람이래’
그의 어머니와 정윤재 선진의 어머니가 함께 다니는 곳에 따라다니며 원불교를 만났다. 당시 선방에 공부하던 교무님들이 사람 같지 않고 천사 같아서 ‘나도 전무출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의 반대로 영산에 가지 못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젊은 아가씨들을 끌고 간다는 소식에 걱정하던 어머니 덕에 민산 이중정 종사와 결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집가는 것을 거부했던 그는 ‘신랑이 불법연구회 사람’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그렇게 음력 11월 15일에 결혼을 했는데, 12월이 되자 민산종사는 “불법연구회의 큰집이 솜리(익산)에 있으니, 내가 거기 가서 살다가 가끔 왕래하겠다”며 익산으로 간 후 무려 3년 만에 집에 들렀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남편도 없이 하는 시집살이에 유일한 재미는 교당 생활이었다. 법회 외에도 공동출역(공동작업)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나섰다. 당시 출역에 진심이던 김홍철 선진은 출역이 있는 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징을 들고나와서 “모여라” 소리치며 징을 쳤다고. 그렇게 출역도 하고, 교당에 모여 연극을 한다고 동네 사람들과 연습하며 ‘그러니 저러니’ 살았다.


‘아버지처럼 생각해라’ 하신 주산종사
어느 날 저녁, 교당에서 “총부에서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드리러 오라”고 했다. 도착해보니 주산 송도성 종사가 와있었다. 이미 사람이 꽉 찬 교당 바깥에서 보고만 있다가 시누의 손에 끌려 들어갔다. 그런 그를 보고 주산종사는 직접 자리를 마련해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 손을 꼭 잡으며 “날 선생님이라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처럼 생각해라. ‘우리 아버지 오셨다’ 생각하면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애롭게 챙겨준 주산종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 못하고, 제사도 참석하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

가정을 일으킨 권장부의 삶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었어도 남는 게 없던 형편이었다. 수계농원에서 근무하던 시아버지 이형국 선진이 돌아와 가정을 돌봐 익산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이 났다. 그때 시누를 잃어 시누의 아이 3남매까지 그의 몫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픈 자녀의 치료를 위해 1년간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와보니, 집 하나도 남지 않고 모든 재산이 넘어갔다. 민산종사가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진행한 일이 다른 친척의 농간으로 어그러진 것이다. 그래서 식구들을 돌보기 위해 10년을 기약하고 민산종사는 원광고등학교 서무과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런 남편을 기억하는 김 원로정토는 “그런데 이 양반이 10년이 다 되어도 월급 타서 10원 한 장, 천 원 한 장을 집에 안 갖다 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숙을 쳐서 애들 키우고 가르쳤죠”라며 웃었다. 하지만 전무출신이 가정을 살핀다고 돈 벌려다가 사람까지 버리겠다 싶어 남편에게 총부로 돌아가라고 했다. 걱정하는 남편에게 “여기 계신다고 나한테 돈 준 적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총부로 가세요” 하며 대범한 권장부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대범했던 마음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다행히 돈이 하나도 없을 때 어디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꼭 도움을 받았다. 한 번도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없던 그때를 회상하며 그는 “내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는 게 아니고 법신불 사은께서 가는 곳마다 돈을 주게 하셔서 아이들을 키우게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우리 원불교가 잘되기만 바란다”
정산종사의 ‘진흙 속의 연꽃이 되라’는 부촉 아래 만들어진 정토회는 전무출신 부인들로 구성돼 신앙과 수행,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다. 정토들은 늘 형제같이, 도반으로 의지하며 교단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그런 역사를 지내며 많은 교무 가족들은 총부 인근에 지내며 교당과 총부의 일을 돕고, 해외의 봉불식도, 장례식도 함께했다. 그런 모습을 본 후배 정토들에게 “우리도 나이 먹으면 형님들같이 자매처럼 살아야겠다”는 말을 들었다던 그는 “요즘 정토들은 다 배우고, 직장도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게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후배들한테 배워야 해요”라며 겸손을 보였다. 

그는 이생에 좋은 법, 좋은 회상 만났으니 빚진 것 싹 갚고, 마음공부만 잘해서 마음 하나 잘 챙겨 가고 싶다. “우리나라와 세계가 평화롭게 되고, 우리 원불교가 날로 달로 커서 잘되기만 바라요.”
 

임타원 김도진 원로정토

[2022년 7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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