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원기78년(1993) 북경과 연길, 심양에 세 명의 출가교역자가 정식으로 파견됐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원기107년(2022)년 현재 원불교 중국교구에는 11개 교당에 12명의 출가교역자가 근무하고 있다. 현지 특성상 적극적인 종교 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사이 중국교구는 차곡차곡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에 <원불교신문>에서는 중국교화 30년을 맞이해 지난 시간에 담긴 의미를 살피고, 중국교화의 미래를 그리는 시간을 마련했다. 좌담에는 김길선 중국교구장, 조상도 홍콩교당 교무, 김도원 중국교구교의회의장, 제종석 청도교당 교도회장이 참여했다. 해당 좌담은 7월 1일 오후 3시(한국 시간) 줌(ZOOM)으로 열렸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제종석: 원기65년에 부산 양정교당에서 입교했다. 원기90년(2005)에 출장을 왔다가 청도에도 교당이 있는 걸 알게 돼서 법회를 보러 나갔다. 2년 뒤(원기92년) 가족과 같이 청도에 와서 교당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청도교당으로 가족들이 모두 전입했다. 청도는 항구도시이고 본래 살던 부산과 비슷한 느낌이라서 생활이 편하다. 중국 생활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교무님이 지원도 많이 해주시고, 아침마다 좌선도 하면서 현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교당이 가까워서 사회생활과 교당생활을 겸해서 할 수 있어 기쁘게 살고 있다.

김도원: 신촌교당을 30년 넘게 다녔고,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다. 업무 차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청도교당과 베이징교당을 다니다가 2010년도부터 베이징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교화 30년사 가운데 3분의 1을 보냈다. 중국교화는 현재 한국 사람들만 데리고 교화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쉽지만은 않다. 30년 동안 한참 발전해서 어느 정도 교화가 잡혀가는 상황에서 코로나19라는 상황과 중국 정부의 상활 때문에 다시 10년 전 쯤으로 돌아간 듯하다.

조상도: 원기90년에 출가했다. 홍콩교당 주임교무로는 6년째 근무하고 있다. 부교무로 처음 홍콩에서 1년을 살고 국내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고은경 교무님의 건강 문제로 교당이 잠깐 빈 사이에 후임을 찾는다고 해서 지원했다. 홍콩교당 4대째 교무이고, 조금 더 근무하면 영주권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상태다. 영주권자가 있으면 다른 부교무나 보좌교무님이 이곳에 발령받는 데 용이한 면이 있어서 지키고 있는 중이다.

김길선: 중국은 내 교화의 인연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재발령을 받고 해서, 세 번째 발령받아 7년째다. 중국교화는 총 22년째다.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 같다.
 

‘차라리 잘됐다. 교화 30년을 맞아 정비를 하자’는

콘셉트를 잡고 교구와 교당 사진 정리,

사무 정리, 역사 정리 등으로

30년을 자료화하는 시간을 갖고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중국 현지 상황이 많이 어려웠을 텐데.

제종석: 중국에 들어오던 2007년만 해도 경제가 호황이었다. 그러다 2008년에 세계적 경제위기가 왔다. 당시 청도에는 20만 명의 교민이 있었는데, 이때 절반 이상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타지로 옮겨갔다. 2016년에는 성주 사드배치 문제로 인해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예민해지면서 교민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협조를 얻기 어려웠고, 이때 나머지 교민 중 3분의 1이 철수를 했다. 중국에 편하게 왔다갔다 하던 분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에 다시 못 들어오게 됐다. 우리교당(청도교당) 역시 원기100년에 30여 명이 법회를 봤는데, 지금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인원이 법회를 본다. 그러나 7월부터 중국이 문호를 점점 열어가고 있고, 세상에는 ‘극하면 변한다’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기회와 희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도원: 저 역시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막 발생했을 때 교구장님과 함께 전산종법사님을 뵙고 교단에서 지원을 받아 중국에 마스크와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그때는 2년 6개월 넘게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나, 교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현재는 언제 다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조상도: 홍콩은 여러 가지가 조심스럽다. 코로나19 상황 이전에는 법회출석이 7~10명이었는데, 지금은 1명이다. 직장이 없어지고 경제활동이 불안정해진 교도님들이 영국이나 미국, 한국 등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보니 교당의 경제도 어려워졌다. 교구장님께서 “자네가 교화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씨를 뿌리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잘 버텨달라”고 하신다.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김길선: 코로나19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에너지 발산에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바깥일 말고 안의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교화라는 게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되는 면도 있지만, 이런 시국은 썰물일 때 투망을 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차라리 잘됐다. 교화 30년을 맞아 정비를 하자’는 콘셉트를 잡고 교구와 교당 사진 정리, 사무 정리, 역사 정리 등으로 30년을 자료화하는 시간을 갖고있다. 교구장으로 중국교구에 다시 오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했는데, 재가출가 교도님들이 열심히 참여했다. 천일기도가 끝나고 또 천일기도를 하자고 해서 현재 1600일을 넘겼다. 기도를 하면서 해결된 일들이 많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진 적공하면 그 속에서 이룸이 있겠다는 믿음이 있다.
 

마스크 지원사업 이야기를 조금 더 해달라.

김도원: 2020년 2월에 발안했다. 마스크 품귀현상에 중국현지 정부기관과의 연계성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중국의 심각성을 중앙총부에 재차 지원 요청해 마스크 2만여 개를 지원받았다. 중국 홍십자회(한국의 적십자와 같은 기관) 본부에 1만 개를 기증하고, 중국불교협회에 8천여 개, 교민사회 등에 기증했다.

김길선: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파출소나 관리사무소에 갖다 주면서 우리에 대한 인식을 많이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마스크가 귀할 때라 효험을 톡톡히 봤다. 청도교당 같은 경우 마스크를 따로 구입해 지역사회에 전달했다.
 

중국교화가 올해로 30년을 맞이했다.

조상도: 원기36년 장적조 선진이 만주기반으로 동북지방 순교 활동을 했던 역사가 있다. 정식 중국교화 기점은 원기78년(1993)이다. 원기77년 한중수교 이후 이듬해(원기78년)에 교정원 인사정책에 따라 북경, 연길 등에 출가교역자 사령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연변교당의 경우 원기77년에 사직교당의 연원으로 1층 상가와 2층 생활관이 마련되어 있었고, 북경교당은 당시 반포교당 노홍원 교도회장의 주선으로 형님인 노재원 주중 한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교무가 근무를 하면서 시작됐다. 대각개교절 기념식으로 첫 교화가 시작되었고, 12월 명절대재 때 한국유학생회를 창립함으로써 본격적인 정기 법회가 이뤄졌다.

김길선: 30년 동안 중국에 다녀간 교무님들이 42명이다. 가장 길게 근무한 분은 양세정 교무님(25년)이고, 그 다음이 저(22년)다. 중국교화 30년을 터닝포인트로 삼고자 한다. 자선 분야의 활동은 어떻게 해나가고, 교역자 배양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구체적이고 미래지향적 사고 함양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도원: 원불교가 미국종법사를 만들어내는 시대로까지 발전했음에도, 중국은 30년이라는 세월이 쌓인 채 정체된 느낌이다. 그만큼 중국은 미국과 차이가 있고, 종교적이고 법률적인 제한도 많은 환경이다. 하지만 중국은 분명 기회의 땅이고, 지금은 기회의 시기다. 지금까지의 30년이 후대에 더 큰 발전을 이루게 할 거라는 기대가 있다.

제종석: 중국에 온 지 올해로 16년 차다. 중국교화의 절반 정도의 시간을 함께한 셈이다. 제가 중국에 들어올 땐 중국교화가 교민사회 저변에 스며들고 있어서 나름대로 분위기가 좋았다. 원기100년을 준비한다고 각 교당별로 으쌰으쌰하던 분위기도 경험했다. 지금은 비록 어렵지만 교민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씨앗이 온 중국에 퍼져나갈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중국은 분명 기회의 땅이고,

지금은 기회의 시기다.

지금까지의 30년이 후대에

더 큰 발전을 이루게 할 거라는 기대가 있다.

현재 중국교구 내 원불교의 활동 내용이 궁금하다.

김도원: 중국교구는 현재 교당 11개, 12명의 출가교역자가 근무하고 있다. 기관으로 연변삼동유치원이 한국종교로서 모범적으로 운영되다가 운영 16년 만에 문을 닫았다. 연변 삼동인터네셔널도 원기97년부터 4년간 활동했었다. 훈춘 특수보육학교, 경신 희망소학교 건립 후원 등의 활동 기록도 남아있다. 현재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교당 체제는 유지되고 있지만 교도님들이 한국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과 비자 문제로 인해 일부 교무님들이 중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 등에 처해있다.

제종석: 원불교 중국진출의 이면에는 북한과 거리가 가깝고 교류가 활발하다는 면이 있다. 그런 목적으로 연변 등에 삼동사회복지시설 등을 초창기부터 설립해 운영하면서 학생들의 학용품 지원, 후원금 등의 도움을 10여 년간 진행해온 사례가 있다. 청도교당의 경우 산동지방에서 낙후된 이수라는 지역에 위치한 마랑소학교와 결연을 맺어 학비, 학용품, 의연품 등을 지원하고 매년 교도님들과 학교에 방문해 문화행사도 했다. 이후 교민들이 힘을 합쳐 한국 정부에서 주관하는 ‘청운학교’라는 국제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교당과 교도님들이 합력해 천만 원 정도 지원을 했다. 올 초에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지역사회에 나눔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문화원을 개설했다. 요가나 한글학교 추진을 위해 교무님과 교도님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

김도원: 국제학교에서 지역주민 활동을 할 때 베이징교당 교도님들이 직접 김치를 담가 판다거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봉공회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원불교 베이징교당 김치가 맛도 좋고 질도 좋다고 해서 완판이 될 정도였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활발하게 지역주민을 위한 나눔 활동 등을 했었다. 그 외에 베이징교당에도 별도의 문화원 시설이 있어서 문화원을 통해 다양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강연, 붓글씨, 수묵화, 선요가 등으로 교당을 개방하여 ‘여기에 원불교가 있구나’를 알리는 것을 지향했었다.

김길선: EM을 만들어 환경운동을 했고, ‘희망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소학교에 물품 지원사업을 했고, 문화원에서는 현재 어린이 요가와 발레가 진행되고 있다. 교당을 비우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연길교당 박도광 교무의 경우 현지인 출신으로서 현지 밀착형 교화를 하고 있다. 등산회에 참가해 지역민들과 인연을 맺고 원불교를 알리는 교화를 한다. 삼동인터내셔널을 통해 장애인 2명의 수술을 원광대학교병원에서 받게 한 적도 있다. 항주교당은 다도 특화 교화를 하고 있다.

조상도: 교구 내 11개 교당에서 4축 2재와 정기법회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항주교당은 다도와 명상을 결합한 정념다도 특화 교화, 청도교당은 요가 등 문화원을 통한 교화, 저는 한국어 교육과 지역사회 체육활동 등을 통해 인연을 꾸준히 맺어가고 있다.

김길선: 교무가 움직이는 것은 곧 원불교 법당이 움직이는 것이다. 여러 활동으로 자꾸 만나면서 확산이 된다.
 

중국에서 공부와 교화를 하며 가장 기쁘고 보람됐던 순간이 있다면.

김도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2018년에 경산종법사님이 중국불교협회의 초대로 중국에 일주일간 머무셨을 때다. 원불교 교도로서 종법사님을 가장 가까이, 그리고 오랜 시간 옆에서 모시고 생활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는 베이징교당 1호 법호인이 된 것이다. 교도로서 중국에 와서 1호 법호인이 됐다는 점이 매우 기뻤다. 농담 삼아 “중국에 왔으니 ‘중산’이면 좋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법호가 그렇게 나왔다. 중국 교화하는 교도로서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제종석: 한국은 일요일 법회 후 집에 돌아가기 바쁜데, 중국에서는 교도님들이 일요일 법회만 기다리기 때문에 교도 수는 적어도 출석률이 높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서로 잘 모였다. 춘절(설)에 한국으로 귀국을 많이 하는데, 이런 기회에 성지순례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원기94년에 한국에서 설을 지내고 25여 명이 모여 성지순례를 하고 종법사님도 뵀다. 중국은 영주권 제도가 없어서 결국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도에는 개인사업자들이 주로 상주한다. 타국에 살다 보면 나름대로 아픔도 많고 마음의 갈등도 많이 겪는데, 그런 분들이 교당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기회가 됐다. 청도교당을 거쳐 간 분만 150명이 넘는다. 그 인연들이 다시 잘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저도 청도에서 법호를 받았다. 중국에서 법호를 받고 보니 책임감이 더 강해지고, 원불교 교도로서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조상도: 개인적으로 천도재를 지냈을 때의 기억이 많이 남는다. 현지인 남편을 잃은 여자 교도님이었는데, 천도재를 지내면서 어려운 마음을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무로서 보람이 크게 느껴졌다.

김길선: 중국교화 초창기에 법당이 없을 때, 공원을 옮겨 다니면서 비닐 같은 천을 바닥에 깔고 법회를 봤다. 밥을 직접 해서 밥통과 반찬을 들고 유학생들과 법회를 보고 교화했던 때가 참 좋았다. 말 그대로 개척의 일면인데, 교역자 생활의 소중한 기억 중 하나다. 캠퍼스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이번에는 북경대에서 주관해라” 하면 서로 돌아가며 주관을 했다. 그렇게 법회를 4~5년간 봤다. 그러다 법륜공 사건이 터져서 공원에서 모이지 못하게 됐고, 교당을 마련하자고 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자란 것은 교당별로 시주를 받으러 다녔는데, 그때 선진들의 혈성 어린 마음이 모이는 것이 참 감사했다. 공심으로 하니 돈이 다 모아져서 교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교역자의 생명은 법회에 있다고 하는데, 북경에 있으면서 4축 2재나 법회를 보지 않은 적이 없다. 여기에 교역자 생활의 신념과 보람이 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하시고 선진들이 모아주신 혈인의 정신으로 이곳에서의 모든 사업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원불교 교전>이 중국어로 번역돼서 출판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굉장한 의미가 있다.

김도원: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 때 중국인 10명, 조선교포 30명, 한국인 교도들 129명 등 170~180명이 참석했다. 행사 후 성지순례까지 했다. 한족들이 함께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어려움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

제종석: 외국에서 들어오는 선박을 중국에서 수리하는 게 주업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외국 배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업무의 90%가 막혔다.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요청하고, 급여도 자발적으로 30%씩 감축했다. 하지만 상황이 장기화 되니 ‘내가 중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됐다. 그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한 생각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이뤄진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랬더니 기존 업무와는 전혀 다르지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면서 2020년 중반에 배에 새로운 장비를 설치하면 시 운전을 하는 일을 대행하게 됐다.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2021년 부터는 그 업무가 주 업무가 되어 바빠졌다. 생각을 접지 않고 지킨다면 일은 반드시 이뤄진다’를 크게 경험하는 계기였다. 신앙생활과 병행하니 견딜 수 있었던 것 같고, 새로운 기회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도원: 지금이 가장 어렵고 힘든 때인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준비를 해야한다. 문제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이다. 종교 활동이나 기업운영은 이치적으로 동일하다. 종교의 하드웨어는 공간, 자금 등이라면, 종교의 소프트웨어는 훈련된 교무, 교도다. 기업도 사주와 임원, 직원, 설비 등이 있어 돌아간다. 이 4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중국교화를 이런 입장으로 보면 작지만 교당은 마련됐고 교무님도 있다. 하지만 교도들이 빠지고, 교도가 빠지니까 교당 재화가 빠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보완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인재)이다. 중국에 와서 교화를 하겠다는 창립정신을 가진 교무님과,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조선동포), 중국인 등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교구장님과 상의하에 2019년에 인력 양성 재화 마련 계획을 세워서 재단을 만들고자 1억을 약정했다.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모으고, 중국 각 교당에서도 십시일반 해 재단을 튼튼하게 만들면 중국인이나 중국교포가 원불교학과에 갈 때 장학금을 줄 수도 있고, 중국어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한국 교화 인재를 키워줄 수도 있다. 많은 장학재단이 처음엔 작게 시작했다. 어렵지만 열심히 재단을 정비해서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중국교화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이러한 시도가 중국교화의 초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꿈이자 목표다.

조상도: 적극 공감한다. 홍콩교당 역시 후임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존속이 어려울 것이다. 인재양성과정에 있어, 직접 현지에 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교도님들과 교류하면서 이 일에 필요한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현재 홍콩은 매우 변화무쌍하다. 이곳에서 교역자가 체제를 알지 못하면 적응이 어렵고, 그만큼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인재양성은 1~2년 만에 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김길선: 저는 스스로를 ‘전쟁터에 나가있는 사령관’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정부관계, 교당관리, 교화관리 등의 사건이 이어진다. 사드 문제, 코로나19 상황, 교당 건물 보수 문제, 국내로 들어간 교도들 등 여러 상황이 계속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기도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면 환하게 해결책이 보인다. 우리 많은 선진들도 이런 심법으로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중국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들어왔는데 다시 한국으로 갔어야 할 때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역경은 설산이요, 난경은 화산이라’는 말이 있듯, 어려움도 언젠가는 소멸되더라.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법력이다. 교구장으로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중국 현지의 교무님과 교도님들이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열악하고 피폐함에 따라 정신적으로 위축돼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환경에서도 자리를 지켜주는 교무님과 교도님들이 정말 장하다.
 

성과 속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교무가 자기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한다는 점을 신선하게 느낀다.

생활 속에서 불법을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다.

중국교화 30년에 담긴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

김길선: 코로나19로 인해 뭔가를 조직하고 의논할 상황이 안됐다. 일단은 지난 30년의 역사가 담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중국교구 교도들을 결집할 수 있는 자리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30년을 맞아 뒤를 돌아보고 멀리 뛸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역사적 서류 정리, 중국 교화 초창기의 교화 이야기 등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교화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타이틀은 그렇게 정해졌다. 그다음, 이론적 방향성을 정립할 수 있는 교화포럼 내지는 학술발표를 하고자 한다. 중국교화에 대한 연구 자료가 전무한 상황이다. 교리적, 사회적, 종교역사학적 흐름의 측면에서 중국에 원불교의 방향성에 대한 전문연구도 의뢰하고자 한다. 중국교화의 큰 성과 중 하나라고 하면 <원불교 교전>의 발간과 아울러 발간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북경대학교에서 했던 것이다. 중국불교협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감으로써 불교협회 스님 두 분(보정스님, 달정스님)을 석사까지 받게 한 것도 엄청난 불사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불교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의 1순위를 조계종이 아니라 원불교에 준다. 굉장한 의미다.

김도원: 역사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건 기록이다. 30년 동안 어떤 교화를 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기록물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중국교화 역사에 오랫동안 함께 한 교구장님이 계셔서 가능한 일이고, 코로나19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을 잘 남겨서 향후 더 좋은 생각을 가진 분들과 함께 이 만리장성의 벽을 허물고 교화를 해나갈 방법을 함께 고민해나가고 싶다.

제종석: 원불교에서도 36년을 1대기로 보는데, 그렇게 보면 중국도 이제 1대를 지나가는 시점에 있다.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고, 이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내실을 다져야 한다. 한국에 가면 그동안 교당을 거쳐 갔던 분들을 다시 만나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경험한 중국교화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놓고자 한다. 지금이 기록을 남기는 데 적기다.

조상도: 홍콩은 올해로 19년이 됐다. 불과 19년임에도 현지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30년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더 남다를 것 같다.
 

현지에 가장 반응이 좋고, 현지에 가장 잘 맞는 원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제종석: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는 굉장히 많다. 처음에는 문화 차이에 부딪힐 때마다 “왜 이럴까” 하는 원망심이 많았다. 하지만 살면서 조금씩 수용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같은 동포이고 한집안이라는 것을 수용하면 서로 화합이 된다. 서로 인정하며 인연을 걸어가면 뭐든 잘 풀린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내용의 교리를 넓혀가야 한다.

조상도: 일상수행의 요법 5조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가 중국에 잘 맞는 법문이다. 실제로 중국인들에게 이 법문을 보여주면 좋아한다. 또, 불법을 공부하는 교당이 시내에 나와 있다는 점도 좋아한다. 성과 속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교무가 자기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한다는 점을 신선하게 느낀다. 생활 속에서 불법을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다.

김도원: 중국 사회생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본인들도 잘 알고 있는 배금주의 사상이다. 자기중심주의도 만연해있다. 이 두 가지가 계속 커나가는 상황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과의 협조관계나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중국 정부도 알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중국정부도 “종교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종교로 해결해야 하는가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작금의 상태를 보면 중국도 언젠가는 문화 1등국이 되기 위해 종교를 개방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원불교의 가르침이나 법문만큼 더 좋은 것이 없다. ‘한울안 한이치’, ‘사은사요’와 같은 기본 교리가 중국에서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종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한 중국의 변화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 원불교도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을 변화시키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김길선: 교리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성지를 한번 보여주는 감흥이 더 크다는 것을 지난 20여 년간 많은 한족과 재중동포를 통해 경험했다. 이 사람들은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절대자에 의한 피존재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성에 바탕한 개체의 존중성이라는 부분을 특이하게 생각하고 이해를 잘 한다. 중국정부에서 국경절에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이는데, 최근 ‘정신문명’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 교리의 ‘정신개벽’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중국도 언젠가는

문화 1등국이 되기 위해

종교를 개방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원불교의

가르침이나 법문만큼 더 좋은 것이 없다.

현지어로 정식 출판된 <원불교 교전>에 담긴 의미가 있다고 들었다.

제종석: 원기91년 8월에 ‘원불교 교전 (중문판) 출판기념 학술회’가 국제우의 호텔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북경대학에서는 ‘출판기념 국제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한국과 중국의 교수진, 중국교구 교무, 중국불교협회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런 행사와 학술적 활동은 종교정책에 제약이 없어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학술 방면으로 접근해나가다 보면 중국에서 원불교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길선: 항산 김인철 종사님이 중국에 오면 루우열 교수님을 꼭 만났다. 북경대학교 종교연구소 루우열 교수님은 중국불교의 석학이다. 북경대학의 탑이고, 그 제자들이 중국불교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이 어른이 우리 <원불교 교전> 중문판 총 감수를 했다. 가산 김성택 원로교무님은 그때부터 번역적인 측면을 교수들과 다루고, 인간적 교류나 방향성은 항산종사님이 챙겼다. <원불교 교전>을 번역하기 위해 김경진 교수(중앙민족대학 교수, 재중동포)와 루우열 교수는 영산 성지에서 김이현 종사님을 모시고 단어나 사상적 부분을 공부했다. 김경진 교수가 번역을 하면, 그 내용을 루우열 교수가 현지에 맞게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번역한 내용을 현지에 맞게 검수했더라도 종교서적이라 출판사에서 다 검토를 받아야 했다. 검토에서 통과해야 종교문화출판사에서 출판을 할 수 있다. 종교문화출판사에서 출판이 되면 서적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1차에 <원불교 정전> 6천 권을 인쇄해서 3천 권은 신화사(한국의 교보문고와 같은 곳)에서 팔았고, 3천 권은 우리가 인수해서 배포했다.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 때 거기에 정산종사법어와 불조요경을 넣어 <원불교 교전>으로 출판했다. 남은 건 예전, 교사, 성가다. 앞으로 중국에서 종교활동이 인정되었을 때, 원불교는 사상적으로 인정받은 책이 준비돼 있다고 바로 보여줄 수 있다. 우리 교당 건물에 공안이 있어서 법회 보는 것을 다 안다. 법회 명단도 미리 보고한다. “너희는 뭐하는 곳이냐”고 물을 때 교전을 보여주면 끝난다. 종교문화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종교활동 인정이라는 하드웨어는 아직 안됐지만, 교서라는 소프트웨어 준비는 다 돼 있다. 중국에서 이뤄낸 혈인성사다.
 

중국교화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다.

김길선: 개인적으로 현지화라는 말보다, 토착화라는 말을 좋아한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종교와 사상을 강요하면 불법이지만, 자기들끼리 활동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현지인을 교무로 키워 활동을 하게 하면 된다. 한족 교역자를 길러내는 것이 토착화의 제1과제다. 두 번째는 법인화다. 현지 법인화를 하게 해서 자산관리를 어떻게 하게 하느냐가 숙제로 남아있다. 또, 중산님(김도원)이 만든 장학재단도 앞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장학재단을 통해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

김도원: 중국인을 교무로 만드는 게 어렵다면 그 전 단계로 재중동포 중에 교무를 만들 수도 있다. 이는 향후의 중국교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중국을 아는 사람들이 교화를 하며 실제 중국 활동 중 일어나는 법률·회계·재산적 문제를 풀어가면 훨씬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교육을 시작해도 10년은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원광대학교와 중국의 불교대학이 학점교류나 학교교류 과정을 만들면 도움이 되리라 본다. 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현지에서 우리가 뭔가를 확장해나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중국교화에 서원이 있는 예비교무님을 지원해 배출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자 한다. 그래야 중국에도 선학대나 훈련원이 생기지 않겠나.

제종석: 중국교화 중 가장 힘든 부분이 교무님들의 지위관계, 곧 비자 문제다. 어떻게 하면 교무님들이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법인화’다. 중국에는 두 가지 법인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해외에서 투자하는 해외법인 또는 투자법인이고, 하나는 중국 내에서 운영하는 법인이다. 한국에서 관리를 하려면 외국의 투자를 받는 투자법인이 되어야 한다. 그건 모든 자산이 한국의 소속이라는 의미가 된다. 내자 법인을 만들려면 결국 중국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더 어렵다. 결국 한국에 있는 교단에서 중국에 외국 투자법인을 만들고 거기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어떤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조상도: 한국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상당히 우호적이다. ‘시민의식은 한국 사람이 훨씬 낫다’는 인식이 있다. 한국 사람들끼리도 ‘원불교 교도는 수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웃 종교인들도 원불교인들에게 편안하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최근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가 모인 종교인 모임에 다녀왔다.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불교 교무라고 하니 다 환영해주고 편안히 대해줬다. 모든 게 선진님들이 쌓아온 덕분이라 생각한다. 원불교만이 가진 친근감과 원만성으로 접근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가장 어려운 교화의 여건과

환경을 가진 곳이 중국 아닐까 생각한다.
어렵기 때문에 뭔가 얻어졌을 때 더 짜릿함을 느낀다. 

중국에서 함께 공부하는 재가출가 교도님들과, 한국의 재가출가 교도님들께 하고픈 말씀이 있다면.

제종석: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근 청도교당은 문화원을 개설했다. 교도님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유지금 등이 어려운 상황에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신기한 건, 문화원 계약을 하고 나니까 청도로 발령받아 교당에서 거주하고 싶다는 분이 생겨서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됐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저지르니까 해결할 방도가 생기는구나’ 하는 경험을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옳은 일이라면 추진을 해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청도는 중국의 우리 교포와 재중동포가 모두 많이 모이는 곳이다. 청도 내 재중동포가 30만 명 정도 된다. 문화원에는 지역 교민뿐 아니라 재중동포도 온다. 재중동포 자녀들이 문화원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유학 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긴다면, 후에 그들이 중국에 돌아왔을 때 교화로 연결되리라 본다. 실제 사례도 있다.

조상도: 이곳에서는 한국보다도 더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 ‘여리박빙’이라는 말이 딱 맞다. 선교 활동을 거칠게 하는 목사님은 추방 당하기도 한다. 현지 입장에서 우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곳의 관습과 법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적응해야 한다. 또 많은 어른들께서 중국을 교화의 터전으로 언급하셨다. 많은 분이 계속해서 이곳에 관심을 가져주고, 인연 따라 지원도 해주시면 훨씬 더 힘이 날 것 같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신다면 교화하는 데 훨씬 더 힘이 날 것 같다.

김도원: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화, 특히 중국인을 교화하고 교당을 운영하며 산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땅에서 교무님들이 그 일을 하고 있다. 아마 가장 어려운 교화의 여건과 환경을 가진 곳이 중국 아닐까 생각한다. 비자도 내주지 않고, 한국인 외에 현지인을 교화하면 추방을 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교무님과 우리는 사명을 갖고 있다. 어렵기 때문에 뭔가 얻어졌을 때 더 짜릿함을 느낀다. 원불교의 개척정신, 초기교단 정신을 가장 많이 느끼고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땅으로서 중국만 한 곳이 없다.

김길선: 중국교화는 가성비가 좋다. 한국 국민은 5천만 명인데, 중국은 14억 인구가 교화 대상이다. 이곳에 터전을 잡아 커나가다 보면 많은 교화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가성비가 좋으므로 이곳에서 고생하는 것은 복을 많이 짓는 것이고, 진리적으로 다시 많이 받을 것이다. 우리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불교학적으로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진 자리 마른 자리를 가리지 않고 초월한 입장에서 공부심으로 해나간다면 어느 때인가 일원화가 피어나리라 생각한다. 북경교당 봉불식 때 어떤 분에게 ‘일원화 홀씨’라는 시를 받았다. 재가도 출가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곳에 작복 하는 데 힘을 써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린다. 현지에서 살아가는 교무님들 역시 그런 신념으로 살아가 주면 좋겠다.
 

[2022년  7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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