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익산은 원불교의 4대성지 중 하나이자 1924년(원기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열린 곳이다. 그리고 원불교 중앙총부가 자리한 후 백여 년 역사를 함께 해온 중요한 공간이다. 

오늘의 익산시는 정부의 도농통합정책에 따라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돼 탄생했다. 조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는 이리읍이었고, 미군정기인 1946년에 이리부로 승격되었으며, 정부 수립 이후 1949년에 이리시, 마침내 1995년에 익산시로 변모해 왔다.

일제 말기(1938) 익산군 인구는 163,196명(조선인 157,184명, 일본인 5,938명)이었다. 광복 직후 익산지역 일본인은 9,963명으로, 전북에서 일본인(33,068명)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만큼 수탈의 도시였음이 입증된다. 

오늘날 익산의 이미지는 어떤가? 원불교 중앙총부가 소재한 익산시는 한강 이남에서 인구 비례 개신교 교회가 가장 많은 도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유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일본계 종교, 신종교 등이 산재해 있어 종교백화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다종교사회를 이루고 있는 도시이다. 구한말 이래 남장로교회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많은 개신교 교회가 설립· 운영되던 도시였다. 

일제강점기 익산에 대한 이미지도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하다. 일본인 야마시타(山下英爾)가 쓴 <이리안내>(1915)에서는 ‘백로가 서식하는 가난한 마을(鷗鷺棲息, 寒村)’이라고 적고 있다. 반대로 익산군수를 지낸 박영철(1879~1939)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지역(淑氣,扶輿)’이라 했고, <익산군지>(1932:소기영/1959:홍순태)에서는 ‘여러 가지 형세가 뛰어나고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고장(多形勝又多人文)’이라고 했다. 이는 이리시보다는 익산군을 두고 하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곳을 반촌(班村)이라고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광복 전후로 익산은 한때 군사도시를 방불케 했다. 광복 직전 일본군 제120사단 본부, 예하 부대, 보병 제464연대가 이리농림고, 이리공고, 이리국토관리청 등지에 각각 주둔했다. 이들은 1945년 11월 모두 철수했고 이어서 동년 11월 미 제28군정대가 익산에 주둔했으며, 한국군의 창시가 된 조선경비대(Korean Constabulary) 제3연대도 익산에 자리했다. 

또 이곳은 광복 직후 불법연구회가 미군정청에 등록하고 서울·부산·전주와 더불어 익산역 앞에 구호소를 마련한 동포들을 위한 구호 활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왜 이런 익산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구상했을까? 익산은 교통의 요충지, 미곡주산지, 교육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곳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도덕공동체의 못자리판을 구상하고 직접 실현하는 데 진력했다. 이제 익산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모습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변했다. 현재 익산시 인구는 276,376명(2022년 6월 기준)으로 감소세에다, 2018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북의 종교인구도 서기동불(西基東佛)을 확인케 해주는 데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익산’이 성지이자 도덕공동체의 못자리판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그에 걸맞은 역할도 요구받는다. 이 고장에서 원불교의 존재감이 확인되어야 하고 ‘소태산의 꿈’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쉼 없이 이어져야 한다. 내일도 ‘이곳이 원불교 성지’라고 자신 있게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할 때 의미가 있다.

 /원광대학교

[2022년 8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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