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에게 사랑받던 영산원의 하늘 사람
잊으려도 잊지 못할 정산종사의 함박웃음
“우리 법·문화를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한다”

이타원 이정무 원로교무
이타원 이정무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영산원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이는 성지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사랑을 교단과 후진들에게 되갚고 있다. 초기교단의 생생한 모습을 또렷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타원 이정무 원로교무(理陀圓 李正務·91).

구순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맑은 눈빛과 밝은 미소로 후진을 반겨주었다. 이 원로교무는 44년의 교역생활동안 목포교당·초량교당·돈암교당·동명훈련원·수원교당·대구교당·대구경북교구장을 역임하며 교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일평생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은혜 속에 꽃피운 목포교화
초기 목포교당에는 유지가 없었다. 그래서 목포지역 교화를 크게 하기 위해 강습회를 준비했다. 이 강습회 준비에 많은 선진의 은혜를 입었다. 강사로 고산 이운권 선진과, 성타원 이성신 선진이 각각 오전과 저녁강습을 맡아줬다. 또 강습회를 연다는 내용을 담아 ‘원불교’를 목포에 처음 알리는 벽보. 벽보의 글씨는 한산 이은석 선진이 멋지게 써줬다.

그리고 인연이 닿아있던 목포여객 사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사장은 교무가 앞문으로 가면 뒷문으로 나가고, 뒷문으로 가면 앞문으로 나가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원로교무는 그 집 할머니 방에 들어앉아 버티기 전략을 썼다. “안 나오면 자면서 며칠을 있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만나줬어요. 그래서 ‘선생님, 계속 교당에 나오라곤 안할테니 이번 강습만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목포여객 사장과 어울리던 유지들이 강습회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어려운 교당 형편에 고산종사를 낡은 여인숙에 모셨음에도 고산종사는 강습 이후에 3일을 더 머물며 평상시에도 교당에서 좌선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이때 강습으로 김현관 대호법이 교당과 인연이 됐다. 이후 김 대호법은 목포교당과 교단 발전에 크게 합력했는데, 당시 “우리가 다니는 집이 이래서 되겠냐. 이 정도(교당 밑 교회)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교당을 단독으로 지어주기도 했다. “종법사님을 뵈러 가자”는 마음도 내 정산종사를 찾아뵙고는 정산종사가 하려는 일은 모두 이뤄드리겠다는 신심도 냈다.

영산원의 하늘사람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보자. 일평생 교화현장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정법을 전하기에 전력한 이정무 원로교무는 원기17년 영산성지 영산원에서 태어났다. 다음 해에 태어난 송순봉 종사와는 쌍둥이처럼 함께 자랐다. 영산원의 하늘사람들은 성지기운도 듬뿍, 성지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도 듬뿍 받았다.

당시 선원생들의 막둥이로 얼마나 사랑을 받았던지, 이 원로교무는 “이경순·이정화·이정만·이태연·김태신 등 이런 큰 언니들이 공부할 땐데, 우리가 완전 노리갯감이었어요” 하며 웃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7세 때 증조모님이 돌아가셔서 언니들이 ‘너희 집 증조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놀라 달려간 것이 아니라 언니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러 가보자고 할 정도였다. 그 놀림이 모두 사랑이었음을 안다.

정산종사의 함박웃음
당시 영산학원은 지역 내 유명한 학원이었다. 다른 곳에서 10년 공부해도 영산에서 1년 공부한 것만 못하다 할 정도였다. 당시 영산 바깥에서도 찾아와 6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이 원로교무는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그때부터도 교육에 뜻이 깊으셨구나’ 했던 것이, 절대 영산에 다른 사람을 두지 않으셨어요. 정산·주산 두 형제분만 교대로 영산을 맡게 하셨죠. 이후 고산종사가 그 밑에서 10년을 공부하게끔 하시면서 교육의 질을 유지시키신 거예요”

당시 학원에 정산종사가 있던 때, 매일 아침 송순봉 종사와 함께 문안인사를 올리러 갔다. 정산종사는 인사를 하면 꼭 사탕을 줬었는데, 어느 날은 인사가 끝나도 사탕을 받지 못했다. 다음 날 두 아이는 서로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모두 인사를 가지 않았다.

그렇게 언니들과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산종사가 대청마루에서 문을 열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쟈(저애)들이 내가 사탕을 주다가 안 줬더니 오늘 아침에 인사를 안 왔다. 내일부터 줄 테니까 인사 오너라.” 이 원로교무는 그때 그 함박웃음을 ‘절대 잊지 못할 웃음’이라고 했다.

닮은 듯 다른 두 어른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를 기억하는 이 원로교무가 4살 때 기억을 더듬었다. 노루목에서 영산원으로 올라오는 길이 보였던 사가에서 그는 소태산 대종사가 걸어오던 모습 하나가 기억난다고 했다. “겨울옷(동비)을 입으시고, 밤색 중절모를 쓴 큰 어른이 뚜벅뚜벅 걸어오시는데, 영촌마을이 싹 가려지고 하늘까지 하나 차버린 것 같았어요. 세상이 꽉 찬 느낌 같은 기억만 나네요. 반대로 정산종사는 하얀 모시 두루마기와 파나마모자를 쓰시고 사뿐사뿐 걸어오셨어요. 자비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어요. 그 어릴 때 봤어도 참 대조적이다 생각했죠.”

우리가 나아갈 길
‘세상에 아픈 소식이 너무 많고, 종교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원로교무. “종교는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고,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한 그는, 후진들에게 “불타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종사님 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그 옛날 오만년 대운을 이끌 법을 다 내놓았으니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된다는 것.

일례로 부처님 오신 날과 대각개교절의 관계정리를 들었다. 어려운 시절에 교단을 세운 소태산 대종사도 근로노동과 근검절약·허례허식 타파로 이 교단을 일궜지 관등으로 경제를 키운 것이 아니라고.

“등을 켜는 것은 불교의 문화지 우리 것이 아니에요. 대각개교절은 대종사님 탄생, 깨달음, 개교, 공동생일의 의미가 다 들어있는 큰 날이에요. 우리 것을 제대로 세워야죠. 앞으로 대각개교절에 ‘지구살리기 운동’ 같은 사업에 적극 나서서 국가·사회도 이날의 뜻을 알게 해야죠.”

[2022년 8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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