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문 연 이래 사대문 안에서 100년
3대째 경영철학 ‘지극한 정성은 끝이 없다’
“현재에 존재할 때 지난 시간 의미 살아나”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2~3cm짜리 바늘로 무려 3만 땀이 지나야 한다.
많은 바늘땀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앞서 치수를 재고 본을 뜨고 재단하고… 가봉까지 이뤄진 후에 3만 땀을 거쳐야 번듯한 양복 한 벌이 그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손님과 잠깐 대면하는 것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한 번의 만남에 완성할 수도 없다. 맞춤 양복은 필연적으로 테일러(재단사)와 두세 번의 만남을 필요로 하고, 일일이 그의 손을 타야 한다. 종로양복점에서는 그 과정이 3대째, 100년 넘게 이어지는 중이다.

종로양복점 이경주 대표
종로양복점 이경주 대표

Since 1916
특별히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을 갖진 않았다. 다만 하다 보니 어느새 70년을 지났고, 80년을 넘기고 있었다. 불현듯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자신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시간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마음에 내려앉았다. ‘잘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원불교와 같은 시간에 담긴 이야기를 이경주 대표는 덤덤히 나열했다. 흥했던 시절의 이야기도,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에도 같은 톤이었다. 묵묵한 그 한결같음이 이곳의 역사를 지켜온 힘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할아버지(이두용)는 열다섯 살부터 일본인 양복점에서 일하다 서른 살에 일본으로 유학 가 양복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1916년 5월, 서울 종로1가 보신각 뒤편에 양복점을 차렸다. 그때 지어진 상호가 ‘종로양복점’이다. 1920년대 중반의 종로양복점은 직원만 100여 명, 함흥과 개성에 분점까지 낸 규모 있는 양복점이었다.

1942년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이해주)가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의 어린 기억(5살)에 아버지는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양복 옷감과 미싱을 챙겼다. 그렇게 대구 경산에서도 양복점을 운영했고, 서울 수복 후 다시 종로에 양복점을 열었다. 이 가문의 107년 역사 중 양복점을 운영하지 않았을 때는, 피난길 위의 단 며칠 뿐이다.
 

양복 안쪽에 붙는 종로양복점 상표에 새겨진 돌기의 개수는 대(代)를 의미한다.
양복 안쪽에 붙는 종로양복점 상표에 새겨진 돌기의 개수는 대(代)를 의미한다.

지극한 정성은 끝이 없다
이 대표가 재단사의 길에 발을 들인지 50년을 넘겼다. 시작은 아버지의 권유였다. 당시 스물다섯 살 청년은 ‘양복 만드는 일을 하면 멋있는 양복을 많이 입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뭣 모르니 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당연히 서툴렀다. 재단하려고 가위를 들면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예사였다. 언젠가는 손님이 ‘옷이 맞지 않는다’며 그의 눈앞에서 옷을 벅벅 찢어 던진 일도 있었다. 이 대표는 “그때 단골을 많이 잃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서웠던 아버지는, 정작 한 번도 그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 ‘스스로 깨닫고, 배우고, 헤쳐가라’는 묵묵한 응원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1980년대 후반, 원단을 공급하는 대기업들이 기성복을 만들어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양복 시장에 일대 큰 변화가 일었다. 오랜 양복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종로양복점도 어려워졌다. 그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일감이 많을 땐 정신없이 만들어 납품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한 벌 한 벌에 100퍼센트, 그 이상의 정성을 더 쏟는 기회를 삼기로 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경영철학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끝이 없다)’, 그것이 현재까지의 종로양복점 역사의 길이 되었다.
 

오래며 새로운
정갈하고 깔끔한 7~8평 남짓한 공간.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한 문구가 시선을 끈다. ‘오래며 새로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데다 글씨의 좌우가 반전돼 써져 특이하다. 이 대표가 설명을 붙인다. “손님이 옷을 입어보면서 이 앞(거울 앞)에 서면, 거울에 비쳐서 글씨가 제대로 보인다”고. “가게가 오래되었다고 패션까지 오래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문구에는) 가게는 오래되었어도, 패션은 늘 새롭게 하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거울 앞에 직접 서봤다. 정말로, 그 의미가 와닿았다.

양복 안쪽에 붙는 ‘종로양복점’ 상표도 흥미롭다. 상표에는 커다란 종과, 종을 둘러싼 네모난 선이 있다. 종과 선의 좌우에는 돌기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사장이었을 땐 하나, 그의 아버지가 사장이었을 땐 둘, 그가 사장인 지금은 셋이 되었다. 이 대표는 상표의 돌기가 넷, 다섯으로 늘어나길 희망한다.

얼마 전 5~6년 전에 양복을 맞췄던 고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시죠? 저 양복 또 맞추려 하는데요.” 이 대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 대부분은 이곳의 영업 여부를 따로 묻지 않는다. ‘종로양복점은 으레 그대로일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곳에서 옷을 맞췄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경우도 잦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이 역사가 소중하다.

“내가 지금 가게를 접는다고 하면, 종로양복점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아쉬워하겠어요. 내가 계속 하지 않으면 지난 시간이 모두 묻혀버리고 의미 없어지잖아요. 현재에 계속 존재해야 역사도, 의미도 살아나죠.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하려고 해요.”

50년 동안 매일 셔츠에 넥타이를 갖춰 맸다. 그는 앞으로도 그 모습으로 이곳을 지킬 것이다.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2년 8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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