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성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고요한 물에 온 세상이 비칠 수 있다. 흐르는 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오직 고요하게 멈추는 것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멈춤, 그리고 바라봄. 장자가 말하는 성인의 마음에는 ‘나’라는 상이 없기에, 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 더하거나 빼는 것이 없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잡을 것도 놓을 것도 없다. 문득 일어나는 생각이 한없이 고요한 마음을 흔들 뿐이다. 그 생각 없이, 오직 기의 흐름에 따라 하나가 된다. 그렇기에 움직여도 움직인 바가 없고, 고요히 멈추어도 멈춘 바가 없다. 형체 없는 거울이 온 세상을 담는다.

존재의 본질이 마음에 있다면, 마음은 모양 없이 온 세상과 둘이 아니다. 이것과 저것의 분별은 잠시 머무는 것, 이것과 저것은 지금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잠시 머물 뿐,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은 그러한 변화를 비추는 거울 같다. 형형색색의 만물이 천만 변화해도 참마음은 응할 뿐, 달라지는 바가 없다.

그러니 그 마음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 그 감정은 실체 없는 환영(幻影)과도 같아서, 마음의 것이 아니다. 내 몸조차 내가 아니다. 나라고 여기는 것은 분명 있지만, 그조차 실체 없는 환상과도 같다.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 내가 인식한 내 몸은 이미 과거의 것이다. 마음조차 생각에 의지하면, 매 순간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 시간조차 허상(虛像)이다.

시간은 흐르는가? 아니면 공간이 변하는가? 한 번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하나로 움직인 것일까? 시간을 직시하면, 사실 오직 지금뿐이다. 포착할 수 없는 현재 찰나의 순간, 완전하게 하나를 이룬다. 포착한 순간은 이미 과거, 흐름을 읽어 미래를 예측한다고 해도 그 역시 과거의 생각이다. 실은 오직 현재일 뿐이어서, 그 과거라는 것도 현재의 생각일 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부 생각 속의 일이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궤변이라 치부할 것이다. 시계가 있고, 달력이 있으며,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느낌과 내일의 할 일이 있는데, 어찌 시간이 없다 하는가? 여기서 장자의 생각을 미루어보면, 그러한 현실에서의 시간 분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은 하나의 약속이다. 물리적 세계의 변화를 일정한 주기로 측정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런데 그 변화의 순간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공간적 변화로 치환하면, 한순간도 같은 공간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공간이 변한 것인가? 만약 우리가 항상 같은 공간에 있다면, 당연히 시간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변한 것이라면, 시간이 흐른 것이 확실한가? 모든 존재를 포함한 공간 전체가 통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성인은 고요히 한 판을 비출 뿐이다.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8월 2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