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순신이 꺼내졌다.

2014년 ‘명량’에 이은 후속작 ‘한산-용의 출현’이 7월 말 개봉되면서 이순신 열풍이 전국 상영관을 휩쓸고 있다.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어느새 40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순신’ 세 글자는 식은 피마저 끓게 만드는 영웅으로 살아 꿈틀거린다. 

원불교에서도 이순신은 하나의 이정표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미 충무공에 대해 ‘그 마음 쓰는 것이 도(道)가 있었다. 높은 위에 있으나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었으나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며, 편안하고 명예스러운 일은 다른 장군에게 돌리고 어렵고 명색 없는 일은 자신이 차지했다’며 ‘나라 일이나 천하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거울삼을 만한 분이다’(<대종경> 인도품 52장)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산종사 역시 ‘충무공은 참으로 성장(聖將)이다. 그 강직한 점이나 그 위공망사(爲公忘私)하는 심경, 임금이 몰라주되 불만이 없고 무슨 직에 처하나 충성을 다했다. 낱이 없는 외에 더 큰 것이 없고 사사가 끊어진 외에 더 선함이 없다’(<한울안한이치에>)고 추앙했다.

지금 시대에 이순신이 다시 꺼내진다는 것은 위기의 경고음과 다를 바가 없다. 이순신이 12척 혹은 13척의 배로 왜의 대군을 물리쳤듯이 지금 세상의 혼란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위기를 타고 넘을 지도자를 목 마르게 기다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순신의 그 정신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알다시피,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왜군의 침략을 간과하며 권력에 눈독 들일 때, 이순신은 그들의 침략을 간파하고 거북선 제조와 아울러 바다의 지형을 꿰뚫는 치밀한 준비를 보였다. 그러기에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직위를 가졌다하여 위세를 부리며 부하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정을 일일이 살피며 솔선수범 하였기에 난세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강할 때는 철주처럼 강하지만 부드럽기 역시 봄바람 같이 한다면 어찌 질서를 흩뜨리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공을 계교하지 않고 대의와 백성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패배의 전장을 승리의 전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다. 남을 생각하기는 쉬워도, 나를 놓기는 세상을 버리기보다 더 아까운 게 인지상정이다.

지금 인류에게 보기 드문 위기가 소리 없이 몰려오고 있다 한다. 물질의 세파는 한 번 휩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전조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누가 과연, 다시 이순신이 되어 21세기에 닥친 위기의 바다를 헤쳐 갈까. 이는 원불교의 위기이기도 하다. 정신 차리자.

[2022년 8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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