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으로 한글을 깨치고, 성리에 재미 붙여”
50여 년 군남교당 지켜온 ‘교당의 어른’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이생에는 몰라서 못 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전무출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으로 살아온 삶이라서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굳건한 서원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김자선 교도는 군남교당에 인연이 돼 한평생 군남교당을 떠나지 않고 그 터를 지켜온 교당의 어른이면서, 공부인으로 모든 이들에게 표본이 되어왔다.

군남교당의 교도들은 그를 “가장 모범적인 신앙·수행의 생활을 하시는 어른”이라고 칭한다. 
 

가족들을 정성으로 감화시켜
김 교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으로 군남교당과 인연이 됐지만, 결혼 후로는 남편의 완강한 반대로 교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남편은 제가 교당에 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교당에 가는 걸 말도 못하게 방해 했죠. 한 번은 교당에 못 가게 해도 자꾸 가니까, 처음으로 받았던 교전을 다 찢어서 방에 던져놓고 나갔더라고요.”

남편에게는 집안 식구들 중 사교(邪敎)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어렵게 생활 해온 사연이 있었다. 그래서 종교 자체를 싫어했다.

“그때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교당에 가려 하면 문 앞에서 팔을 벌리고 막고 서 있었는데, 그래도 교당에 다녔어요. 어느 땐가는 일원상 앞에 꽂아둔 꽃을 아궁이에 버리고, 방에 걸어놓은 일원상을 부수질 않나, 목탁이랑 불전도구를 다 아궁이에 버리기까지 했어요.”

그 일로 김 교도는 속상한 마음에 집을 나와버렸다. 갈 곳이 따로 없어서 그 밤에 산을 넘어 교당으로 갔다. 교무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교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대법당에서 기도를 했다. 김 교도는 교당에서 법문을 들을 때, 기도를 올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교당을 못 다니게 했어도 마음 단단히 먹고 교당에 다녔죠. 그리고 마음 챙겨서 공부하고 항상 기도 생활을 했어요. 지금은 남편도 많이 달라졌죠. 원불교가 제일 정직하고 좋은 종교라고 해요. 사경 한다고 하면 옆에서 연필도 깎아줍니다.”

그의 정성심에, 그리고 원불교를 다니면서 보여준 김 교도의 심법에 남편도 감응했다. 자녀들도 어머니의 신앙심에 크게 감동했고, 5남매 중 정인주 교무(도양교당)와 정봉원 교무(한실교당), 정준원 교무(함평교당)는 전무출신으로 출가했다.
 

“사경으로 한글을 깨치고, 성리에 재미 붙여”
50여 년 군남교당 지켜온 ‘교당의 어른’

“돌아갈 데가 따로 없다”
주변에서는 신앙과 수행에 있어서 김 교도만 한 정성심이 없다고 말한다. 집안 시제를 모시거나 특별한 애경사가 아니고서 그는 법회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법회 날이 아니라도 교당에 자주 들러 세정을 살폈다. 결석일은 50여 년 동안 단 며칠뿐이다.

교당을 오갈 때면 교무님에게 생활 속 취사에 대해 문답 감정을 받고, 상시일기를 빼놓지 않았으며, 사경을 통해 교전공부를 챙겼다. 특히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한글을 잘 몰랐던 그는 사경을 하면서 한글에 눈을 떴다. 

“야학을 좀 다니면서 배워놓긴 했지만, 읽고 쓰는 것을 잘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사경을 오랜 시간 하면서 한글을 제대로 배우게 됐습니다. 글도 익히고 교전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성리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나름 성리를 연마하게 됐습니다.”

출가한 자녀들과 성리 문답도 자주 했다. 한번은 셋째 딸인 정봉원 교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만법귀일이라 하는데, 어디로 돌아가느냐’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삼라만상이 부처 그대로고, 내 육신 동작하는 것도 부처 나툼 인데, 어디로 돌아가냐. 돌아갈 데가 따로 없다.”

그는 수행 생활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루도 아침 좌선을 빼놓지 않고 챙겨왔으며, 매일 좌선 시간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저녁 9시면 다시 기도를, 9시 30분이 되면 심고를 모시고 일기를 점검했다. 보통 천일기도도 큰 서원을 세워 한번 이루기가 힘든데, 50여 년 세월이면 만일을 훨씬 더 넘긴 시간이다. 평생을 기도로 살아온 그다.

“기도가 오늘까지 저를 살게 한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교당의 큰 어른
교당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주인의 심경으로 살아왔다. 다른 곳으로 떠나본 적 없는 김 교도는 군남교당을 연원으로 지금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는 큰 어른이다. 초기 군남교당을 위해 불사할 때는 교도들과 함께 산을 넘어 마을을 다니면서 창호지를 팔아 교당자금에 보태기도 했다. 몇 명이 함께 했지만, 나중엔 혼자 남아 마무리를 했다고. 

원기89년(2004)부터 원기103년(2018)까지는 군남교당 부회장을 맡았고 그전에도 주무로 활동했다. 교당을 찾으면 항상 교당 주변 청소와 잡초 제거 등 궂은일을 도맡았고, 교당 대소사에 항상 앞장섰다.

“법회에 오지 않는 이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나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또 친분이 쌓여 마음이 맞는 인연이 생기면 교당에 데리고 가 입교시켰죠. 관등행사가 있을 때는 이웃 마을까지도 찾아가 불사에 동참하도록 권하기도 했습니다.” 
 

수년간 기재해온 일기와 교전 공부한 사경 공책.
수년간 기재해온 일기와 교전 공부한 사경 공책.

[2022년 9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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