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답사는 발견·재이해·통합의 답사
나라를 향한 백성의 외침 ‘보국안민’
다양한 인물과 역사적 특이점 하나로 뭉쳐야

도솔암 마애불
도솔암 마애불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무더운 여름을 지내고 근대한국개벽종교답사단(이하 답사단)은 130여 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산실이자 민족운동의 정기와 인재를 길러낸 역사적 함의를 품고 있는 땅, 고창을 찾았다.

답사단은 이번 답사를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알았더라도 새롭게 이해하거나, 각 장소와 인물마다 고립·분산적인 특징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계기로 삼자’고 했다. 답사지는 고창고등보통학교(기독교), 백남운 출생지(독립운동), 도솔암 마애불(불교), 연화삼매지(원불교),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손화중 괴치도소터(동학) 등이다.

아무것도 몰라도 나라를 위해서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이하 기포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 비가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비를 답사단은 동학 농민들의 눈물로 여기고 숙연한 마음을 가졌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 농민 봉기로 확대된 곳으로 그 의미가 크지만, 그동안 역사적 의미와 별개로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 이에 2022년 지속적인 연구와 지역주민들의 증언을 확보하며 구암리 590번지 일원을 ‘고창 무장기포지’라고 명명,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곳 기포지에서 발표된 포고문에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민중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가 어그러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뜻을 모아 일어난다.’ 

박맹수 총장(원광대학교)은 “힘없고 못 배운 백성들은 나라를 제대로, 바로 잡히게 하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섰다”고 설명했다. 답사단은 내리는 빗속에서 나라의 위기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민초들의 외침을 들은 듯 한참을 묵연했다.

극하면 변하는 것이 천지의 이치
답사단은 원불교 연화삼매지도 찾았다. 연화삼매지는 2020년에 고창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됐다. 젊은 소태산 대종사가 구도 중 중병에 들었을 때 팔산 김광선 종사가 치료를 위해 모시고 갔던 곳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겨울 3개월 동안 쌀 한 말, 간장 하나를 들고 들어와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며 극절한 수행 정진을 했고, 그다음 해 대각을 얻었다. 40여 년 전에는 말뚝만 꽂혀있었지만, 이제는 멋진 비석과 기단이 설치돼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됐다.

이종화 교무(원광대학교 대학교당)는 “어떤 분야든지 극절한 수행과 적공이 쌓이면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소태산 대종사도 이곳에서 3개월 정진 후 다음 해 대각을 이뤘다. 우리도 힘들 때 이곳을 찾으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연화삼매지 소개를 덧붙였다. 
 

백남운 출생지
백남운 출생지

역사적 인물을 향한 확장된 시선
한편 이날 답사단의 첫 코스는 호남지역 인재교육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산실. 고창고등보통학교(이하 고창고보)였다. 이곳의 창립자인 일본인 장로 마스토미 야스자에몽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사업가이자 종교인으로 부인 데르코를 만나 크리스천이 됐다. 조선에 와서는 김제에 농업사무소와 오산교회를 세우고, 고창에는 흥덕학당, 고창고보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을 시작해 고베 신학교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에 우리나라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9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시선에 따라서는 또 다른 평가를 받는다. 시장과 직항로, 치안이 안정됐던 고창에서는 인재 양성을 했지만, 그가 운영하던 김제 농업사무소에서는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등 일본인 지주로서 어두운 면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독실한 크리스천과 악덕 지주의 양면을 가진 마스토미에 대해 답사단은 각자의 평가를 품고 걸음을 옮겨 백남운 출생지를 찾았다. 백남운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이정표나 안내판도 없이 쓰러져가는 건물만 남아있는 그의 출생지에서 박 총장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온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우리가 안고, 넘어서고, 큰 틀로 통합할 부분이다. 이것을 무조건 배제하거나 없애버리려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마을 역사를 안내하던 마을 이장은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혼란한 시기에 마을 내 상잔을 일으킨 부분과 피해자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한다”며 사건에 연관된 후손들의 마음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나눈 답사단은 상호 이해와 용서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자는 다짐을 하며 도솔암 마애불로 향했다.

불교의 품위, 민중의 마애불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불교 유적이지만, 동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1892년, 임진왜란으로부터 300년 후 조선 팔도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호남에서는 “선운사 마애불 정수리에 ‘비결’이 숨겨져 있으며 그 비결을 꺼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주인공은 손화중”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손화중은 당시 호남에서 가장 막강한 동학 조직을 건설하고 있던 무장 대접주였다. 해당 기록은 한국천주교 교회사연구소 <뮈텔 문서>에 남아있다. 

이렇듯 마애불은 불교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동학, 민중의 마애불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당시 큰 종교로서 불교의 품위도 재확인된다. 김제에서 ‘한국천주교의 시작은 불교사찰에서 시작된 서학 공부’였듯, 동학 역시 어려운 고비마다 전국 각지의 사찰이 이들을 보호하고, 키워줬다. 

고창의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동학의 민중 등 다양한 인물들은 기존의 역사 이해와 평가의 시선을 확장케 한다.

[2022년 9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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