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 한다.

동물들이 대체로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먹잇감을 사냥하는 반면, 사람은 그 먹잇감을 비축하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얻었다. 원시시대에는 이러한 단순한 원리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지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이 더 고도화되고 사회화 되면서 사람들은 비축을 넘어서 저축을 생각하게 되고, 다시 축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윤을 자본에 추가하여 생산 규모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다.

인간의 욕망에는 반드시 희생이 수반된다. 물론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는 또 다른 생명체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는 게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의 과도한 욕심은 희생을 넘어서 멸망을 재촉하는 폭주열차가 되기도 한다. 학자들은 지금도 1시간에 1종류의 동식물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은 양육강식이라 했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동족포식으로 작용해 절망을 낳았으며, 혹은 적자생존이라 하여 자기합리화를 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천석꾼 만석꾼을 부러워한다. 혹은 백만장자 억만장자를 이루기 위해 밤잠을 설친다. 지금도 세계적 부호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부를 과시하며 그 기회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그 누군가의 눈물을 만개 훔치고 그 누군가의 피를 천개나 빨은 것에 다름없다. 아니, 그 부를 축적하고 그 욕망을 채우고자 힘과 권력과 돈을 이용해 노동력을 갈취하거나 희생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상위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학자의 주장이 있는가 하면, 한때는 상위 8%가 전체 부의 92%를 차지함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92%는 전체 부의 8%를 겨우 나누고 살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지금도 세계 부의 불균형 불평등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지난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믿었다. 종교는 적어도 중심추가 되어 인간의 욕심을 통제해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궁극적 행복은 마음의 우물에서 퍼 올리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걸 위안으로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다. 인간의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를 비켜간 적이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종교로 인한 위안이 삶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건 가난할수록 더욱 그랬다.
사람들이 지금 시대에 종교를 걱정하는 건, 혹 이런 사실을 종교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가난할 수록 더욱 가까워지는 게 종교이기도 하고, 고독할 때 종교만한 위안은 없다. 

만약 지금, 종교마저 이를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을 찾기 힘들어진다. 종교가 무너진 세상은 욕심이 통제되지 않는 물질중심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소태산도 말씀했다.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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