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조정중 원로교무
인산 조정중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원로원의 복도에 펼쳐진 소담한 화원을 지나면, 작지만 알차게 채워진 방을 만날 수 있다. 인산 조정중 원로교무(仁山 趙正中·85)가 머무는 곳이다. 퇴임 이후에도 방송, 인터뷰,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모습으로 후진들에게 귀감이 되고있는 그는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요즘보다 총총한 그 시절
“어릴 적 기억이 요즘 기억보다 총총해요”라며 천천히 옛 기억을 더듬는 조 원로교무.
일산 이재철 선진의 인도로 총부를 찾아온 부친(덕산 조희석 대봉도)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그대의 법당(얼굴)이 예사 사람이 아니니 출가 수도함이 어떻겠는가?”를 제안했다. 그렇게 부친은 그해 동선에 입선, 입교와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온 가족이 이리(현 익산)로 이사까지 왔다. 

그렇게 원불교에 귀의한 부모님 덕에 그는 불연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인기’라는 불명(佛名)을 받았고, 나중에 ‘화중’이란 법명을 받았다가 지금의 ‘정중’이 됐다.

소태산 대종사에 대해서 그는 3살 무렵 어릴 적 이야기(그는 1938년생이다)를 꺼냈다. 좌선이 끝날 시간이면 어린이들은 ‘조실 할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 여기서 ‘조실 할아버지’는 주변의 어른들이 모두 우러러 모시는 높고 큰 어른, 바로 소태산 대종사다. 

조 원로교무는 “외할머니가 아직 잠자는 아기를 형 등에 업혀서 인사를 보낸 거예요. 그렇게 업혀 가는데 뭘 알아요? 인사를 올릴 때도, 멀뚱히 서 있곤 했죠”라며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리번거리던 중에 창문 너머를 내다보던 조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깜짝 놀랐던 기억은 여전히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조 원로교무는 정식 입교 당시 ‘화중’이란 법명을 받았다. 하지만 발음이 어머니 법명과 비슷해 곤란을 겪어 정산종사를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정산종사는 “내일 새벽에 다시 오거라. 새벽 정신이 밝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찾아간 다음 날 받은 법명이 ‘정중(正中)’이다. 그는 “요즘은 법명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면 금방 지어줘요. 그런데 성현께서는 하는 일이 달라요. 하루 기한을 주고 새벽에 다시 오라고 하죠. 완전히 판이 달라요”라는 말로 스승의 지혜를 전했다.

정산종사에 대한 회고도 이어졌다.  “병을 얻으시기 전까지는 총부에서 제일 활달한 어른이 정산종사셨어요. 4월 총회나 6월 대재가 오면 대중이 총부로 모이는 탓에 총부 사는 것을 보이게 되니까 세세곡절 돌아다니면서 챙기셨죠. 득병 후에는 고요해지셔서, 고요한 혜안으로 교단발전을 하게 하셨고요.”
 

평생 가져갈 법훈을 받다
원광대학교 교학과를 다닐 때 평생 가져갈 법훈을 받는 기연이 있었다. 비 온 다음 날 제초작업 중인 그의 뒤로 어느새 정산종사가 다가와 내려보고 있었다. 놀란 그에게 “네가 덕산님 아들이지?” 하고 물은 정산종사는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지 않는 공부가 큰 공부니라”는 말을 해줬다.

조 원로교무는 “이를 내가 종신토록 법훈 삼고 있어요. 공부를 해보니까 방심이 제일 큰 마구니에요. 그때 말씀을 ‘도를 이루는 데 가장 정성을 다하라. 틈 없이 하라’는 말로 이해해요. 그렇게 교훈을 주신 거죠”라고 했다.
 

사필귀정과 기도로 이겨온 역경·난경
자라는 동안 집안의 분위기와 주변 환경은 그를 자연히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게 했다. 
“제 성향이 정적이고, 심미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맞는 기록과 문화에 관련된 일을 많이 해왔어요.” 그는 전국 각지에서 교당과 기관을 새로 설립해낸 개척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찬성이 있으면, 반대 역시 있기 마련. 그때마다 그는 ‘내가 덕이 이렇게 부족한가. 내 설득이 부족했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럴 때마다 ‘사필귀정이다’, ‘옳은 일이면 한다’는 생각으로 공사만을 바라보고 진행했다. 그리고 합심하기 위해서 ‘기도’에 정성을 모았다. “3년, 그렇게 정성을 쏟았더니 역경과 난경이 차차 풀리고, 재가출가가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어요.” 그렇게 그는 출가 후 총부 정화사를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봉직하며 부산교구에서 교구봉공회관·화명교당을, 경남교구에서 원경고등학교·와룡산훈련원·서마산교당·진동교당을, 광주전남교구에서 광주원음방송국을 설립해냈다.
 

구도정신과 공도정신의 부흥 필요해
조 원로교무는 후진들에게 “우리는 결국 수행자이자, 교화자임을 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은사요와 삼학팔조, 마음공부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일원상을 중심으로 진리신앙, 수행의 길을 닦아야 한다”며 진리를 해석적으로 풀어내는 설법구조도 지적했다. 그리고 ‘교화자가 피교화자에게 어떤 위력과 은혜와 법과 혜명을 전해줄 것인가?’를 고민한 본인의 적공 내력을 전해줬다. 

일평생 좌선에 관심을 두고 적공해 온 그는 ‘일원의 광명’ 회복과 보림을 강조하며 “늘 일원의 광명으로 인지하고, 연구하고, 행동하는 데 노력했어요”라며 “교역자가 실제로 광명을 체득하고, 위력을 얻기 전에는 진정한 깨침과 설득력 있는 교화를 할 수 없다. 스스로 위력을 쌓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고도 말을 못하며, 말해도 실효가 없다”고 했다.

교단의 뜨거운 감자인 혁신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혁신은 제도와 인사에 있지 않다”며 “수행자이자 교화자로서 우리는 ‘구도정신’과 ‘공도정신’을 다시 차리게 하는 것이 혁신”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지금의 교리를 정립하기 전부터 9인 선진에게 ‘그대들은 사를 버리라. 사를 버려야 도를 이룬다’고 하셨어요. 우리들은 ‘도 이루러 온 사람들’이에요. 이를 소중히 생각해야 해요.”

[2022년 9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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