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교당 김성순 교도
신흥교당 김성순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스물 다섯 어린 나이, 함평 이씨 종갓집으로 시집 온 막내며느리는 본인 배가 불러 산고를 치르기도 전에 3살 조카를 아들로 품어야했다. 

“엄마 되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엄마가 가장 필요할 나이에 제게 온 아이가 애처로웠다.” 그렇게 김성순 교도(신흥교당)는 세월이 지나 진짜 산고를 겪고 낳은 아이들 틈에서도 차별없이, 외려 반찬을 더 밀어주며 키웠다. 어린 딸이 “이럴거면 엄마는 오빠랑만 살아!” 하고 샘을 부릴 정도였다. 

그렇게 변치않는 그의 품에서 조카는 잘 성장했고 교무가 되었다.

어느새 지천명을 맞은 이광익 교무는 어린 기억 속 작은엄마, 김 교도를 회상한다. “도리와 윤리를 중요시하고 그게 옳다 생각하면 꼭 실천하는 분.” 그는 본인도 그런 삶의 자세를 배우며 성장했고 전무출신의 서원을 이루기까지 작은엄마의 영향력이 컸다고 전했다. 그 말에도 김 교도는 “광익이가 참 착해서 내가 편하고 좋았지” 하고 공을 마다한다. 


“교당 주인 노릇 잘하소”

 

그리고 “얼마전 와서 작은엄마 손 한번 더 잡아보겠다 하더라”며 외려 고맙다고 왈칵 눈물을 내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동네 가난한 사람, 집이 없는 사람, 병에 걸려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가 일그러진 사람들에게 손수 김장을 해 반찬을 나눠주고 밥을 대접하고 정을 나눴다. 그래서일까, 그는 “사람 사이가 가장 귀하다”고 강조했다. 

시집 온 초기 귀한 마늘 종자를 나눠준 집안 어른이 있었다. 그분 덕에 마늘 농사를 시작해 김장을 할 수 있었고 이를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던 것. 그는 본인도 무한한 감사를 입고 살았기에 베풀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람 사이가 모두 참 귀해요. 주변에 감사한 일 투성이에요. 처음 시집왔을 때 나를 도와주고 챙겨줬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신흥교당 김성순 교도
신흥교당 김성순 교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원기68년 4월 8일, 입교한 그날부터 교당을 제집처럼 여긴 그는 이날까지 교당 앞에 손수 고운 맨드라미를 심는다. 

시집온 날부터 교당 옆에 살았기도 하고 집안 어른들 중 출가한 이들이 많아 집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밥도 안 해보고 시집왔던 시절, 누가 알아주지 못할 서러운 경계도 있었다. 그속에서 어른들이 해주시는 원불교 이야기, 교리 이야기는 하나의 낙이었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어른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종갓집 며느리로 살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댁 어른들의 사랑 덕분이었다. 특히 시아버지는 늘 그에게 “나는 너 때문에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버님 열반하신 게 언젠데 아직도 살아계신 때처럼 ‘옷에 동정 안 달아드렸는데!’하며 자다 놀라 깨곤 해요.” 눈물 맺힌 미소에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다.

김 교도는 문중 어른의 유언 한마디를 늘 품고 산다. 머물다 가실 때면 집에 절을 했다는 어른은 열반 전 그에게 당부했다. “교당 주인 노릇 잘하소.” 그는 그 유언을 가슴 속에 새기며 교당을 집처럼 여겼다.

함평 이씨 집안 가족이기도 한 이호인 교무(신흥교당)는 “우리교당 부교무”라는 말로 김 교도의 공을 높이 샀다. 더불어 ‘함께 깨농사도 짓고, 교당 문화재 일도 상의하는 도반 같은 교도’라고 표현했다. 

교당에 손님이 오면 아직도 밥을 차리고 선물을 보낸다는 김 교도. “교당이 내 집 같아서 해요. 그러지 않으면 못하죠.” 그는 오늘도 막 담근 맛있는 김치를 들고 교당으로 향하는 참이다.

[2022년 9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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