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으로 얻은 성공은 무너질 줄 알았고,
제힘으로 얻지 않은 성공은
자기 것이 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이순신’을 가슴에 품고 산 40여 년, ‘성공한 지도자로서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한 여정’이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리고 ‘그(이순신)의 위기극복 리더십이 교단의 위기를 극복해가는 데 실용적으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김종대(법명 성대·전 헌법재판관) 서울·부산·여수 여해재단 고문. 그가 네 번째 책을 낸 지 꼭 10년 만에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를 내놓았다. 이순신 내면의 가치회로를 찾아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마지막 여정에서, 이순신의 정신을 묻고 답했다.
 

김종대 서울·부산·여수 여해재단 고문
김종대 서울·부산·여수 여해재단 고문

이순신, 지극한 사랑과 정성
국가의 멸망 위기마다 바다를 지키며 위기를 극복한 이순신, 김 여해재단 고문(이하 김 고문)은 이순신의 내면적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슨 직책을 맡기건 이순신은 모든 정성을 바쳤습니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전쟁이 터지면 목숨을 걸고 한마음으로 적과 싸웠습니다. 이순신의 ‘지극한 정성’은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충(忠)은 오직 백성을 향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이순신은 아무런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나라 지키는 일에만 온 정성을 바쳤을 뿐입니다.” 

23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순신 정신, 그 기층적 뿌리는 바로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지극한 정성’인 것이다.

정의와 자력, 하나의 가치회로
이순신은 1580년 전라도 발포 수군 만호로 부임해 근무하다 파직당한다. 상관 서익의 인사청탁을 거절한 이유다.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혔던 정유재란(1597년) 당시, 통곡했던 백성과 군사들은 이순신이 세우는 나라를 꿈꾸기도 했을 터.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의금부도사에 순순히 응했다. 

“이순신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도 옳지 않은 길이면 가지 않았고, 자력의 길이 아니면 취하지 않았습니다. 부정으로 얻은 성공은 무너질 줄 알았고, 제힘으로 얻지 않은 성공은 자기 것이 되지 않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 고문이 구도 과정을 거치면서 정돈한 이순신의 네 가지 가치는 ‘사랑과 정성, 정의와 자력’이다. 

“이같이 장착된 내면의 가치회로는 이순신의 인격을 이루고, 리더십의 뿌리가 되어 어떠한 위기도 반드시 극복해냈습니다.” 
 

 

명량, 구국의 길 위에서
영화 <명량>의 자문을 했던 김 고문. 이순신은 명량(울돌목)에서 12척의 배와 도망병을 거둬 일본 수군을 대파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지만 이순신은 이겼다. 이유가 뭘까. 김 고문에게 ‘명량 승첩’의 원인을 물었다. 

“선조의 재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선조와 조선 대신들에 대한 원망 대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죠.” 이것이 승첩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고 김 고문은 말한다. 

“수군으로 떠돌지 말고 육지로 나와서 싸우라는 조정의 명령을 ‘나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는 사자후로 수군 폐지 명령을 잠재웠습니다(2번째). 그리고 이순신은 전라도 삼백리 길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도움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흩어진 배를 찾아내고 군사를 모으면서 한편으론 군기를 엄정히 다잡았어요(3번째).” 김 고문이 주목해야 할 이순신 정신을 이어간다. “전투의 장소를 길목인 울돌목으로 정하고 거기서 최후의 전투를 치를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4번째). 군사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전의 용감했던 애국병사로 되돌리는 정신 재무장을 시킵니다(5번째). 목숨을 건 비장의 전술을 생각해냈고, 전투에 임해서는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6번째).”

이 대목에서, 김 고문의 눈빛이 강해졌다. “이순신과 군사들은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고, 그러자 하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7번째).” 김 고문이 전한 명량 승첩의 일곱 가지 원인이다.

다시, 작은 이순신이 되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그해, 김 고문은 이순신 사업을 시작했다. 이순신의 가치회로가 우리에게도 장착된다면 다가오는 어떤 위기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이 세상은 건강해질 것이란 믿음에서다. 3년에 걸쳐 이순신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 강사를 길러냈고, 그들은 각각 여해재단(서울, 부산, 여수)을 설립해 작은 이순신을 길러내고 있다.

수위단원을 역임한 김 고문이 생각하는 교단 혁신. 그의 키워드는 공(公)이다. “교단의 미래를 바로 보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마련해야 합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무여한의 정신, 바로 이 지극한 공심으로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작은 이순신이 되기를 바라는 김 고문이 던진 화두다.
 

[2022년 9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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