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총화(總和)가 예전 같지 못하다고 걱정이다.

사회가 개인화로 치닫는 시대흐름을 탓하지만, 출재가 교도들의 교단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는 모습은 극히 우려스럽다. 특히 이러한 신뢰 붕괴의 원인에는 구성원 개개인들의 일탈이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대처하는 교단의 서투른 모습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조직이 이렇게 흐트러진 원인으로 신상필벌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인은 대체로 ‘종교가이기에 인정상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동문수학하며 한솥밥을 먹고 자란 법형제이며 선후진이기에 차마 징계를 주자는 것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는 희생만 강요하며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어지간한 잘못은 눈 감아버리는 것이 폐단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눈치만 보며 좋은 자리를 탐해도 부끄럼이 사라졌다. 곧,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의욕을 상실하고, 그렇게 섞이다보니 서로를 탓할 수 없게 되어 기강은 해이해지고, 이는 다시 실력보다 눈치로 승부하는 하향평준화를 자초해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빈둥빈둥 일하지 않는 사람이나 공히 교단을 탓하며 불만만 쌓아가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다.

최근, 교단에는 여러 가지 위험스런 사건들이 있었다. 어찌 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확대된 것은 신상필벌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여론이 많다. 개인의 신상에 관한 일이야 차치하더라도, 교단적 사건에 대해서는 그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하고 그 책임을 물어 명확히 밝히는 것이 진리적 신앙을 하는 종교가에서 먼저 실행해야 할 일이다. 또 그 잘못과 결과를 공포하여 다른 이들이 다시 또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인과를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혜의 가르침이다. 당사자들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참회로써 자신의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종교인의 자격을 얻는다. 

신상필벌이 매정하다 하여 종교가에서 반드시 권할 일은 아니라 하나, 이를 무시하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다. 원칙 없는 유연함과 애매한 용서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잘 한 것을 잘했다고 하고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어야 사실적 도덕이기 때문이다.

신상필벌의 다른 의미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의 가치 판단을 분명히 하는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자기가 한 만큼의 대가와 결과가 정확하다면, 누군들 열정을 쏟지 않겠는가. 그래서 보편과 평등과 원칙을 기반 삼은 신상필벌은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훨씬 크다 할 수 있다. 일하려는 사람을 알아주는 교단이라야 희망이 있다.

[2022년 9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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