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에 혼을 담아 열두 현을 탄다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지그시 누르다 뗀다. 가볍게 밀었다 놓는다. 활로 켜지 않고, 몸통에 밀어붙이지 않는다. 현에게 손가락이 먼저 묻고 문안하듯 슬며시 다가간다. 가야금은 그제야 긴 몸을 내준다. 소리는 귀를 지나 목울대로 스며든다. 격정이나 비탄으로 억지로 끌고가는 법 없이, 초롱을 들고 사뿐사뿐 앞에서 걷는다. 
긴 현이 손가락을 맞아 소리를 만들고 이를 사람만한 몸통이 울려낸다. 열두 현 위를 열 개의 손가락이 넘실넘실 드나들며 공명을 만든다. 그래서 이 악기는 ‘치’지 않고, ‘켜’지 않으며, ‘뜯’지 않는다. 가야금은 ‘탄’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했던 심사과정
가야금 타는 데 세월도 오롯이 태운 송화자 명인(법명 혜자·남원교당). 그의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 예술가로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이 자리, 심사만 1년 반이 넘는 엄격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했다”고 소탈히 웃는 그, 허나 ‘인간문화재’로 거듭난 후의 삶도 변함이 없다. 

그는 남원 자택에서 연습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커피를 직접 내리고 마당의 감나무에서 감도 딴다. 어머니 때도 그랬고, 할아버지 때도 그랬다. 증조부 박만조는 판소리 동편제를 대표하는 명창이며, 외조부 박봉술을 거쳐 어머니 박정례에까지 그 혼을 이어왔다. 3대째 이어오던 판소리가 4대에 이르러 그에게서는 가야금이 됐다. 

“명창이다, 문화재다 해도 형편이 어려웠어요. 어머니는 식당을 하면서 틈틈이 수업을 하셨는데, 그때 가야금이 인기가 많았지요. 어머니 수업 때 저도 앉았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내로라하는 집안이지만 중학생이 돼서야 가야금을 시작한 이유다. 어머니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추계예술대학, 한양대학교대학원에서 탄탄하게 공부를 해온 그. 스승 김죽파를 만난 것도 대학원 때였다. 

“사실 김죽파류는 제겐 큰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그분께 연결해주니 그저 ‘졸업연주나 하자’는 마음으로 갔죠. 선생님과 마주앉을 때까지도 떨떠름했습니다.”

허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가슴에 불이 붙었다. 그가 알던 김죽파가 아니었으니, 이 성음의 크기나 깊이는 너무 거대했다. 몰라뵀다는 사실이 너무 죄스러워 울면서 가야금을 탔다. 그 후 그는 스승을 사사하며 ‘혼이 손 끝에서 떨어져야 성음이 난다’는 말씀을 늘 새겼다.
 

동편제 박만조 명창 증손녀이자 4대째 국악인
대학원때 김죽파 선생 만나 평생 연주·후학양성
어린이예술단 ‘리틀아리랑’ 다시 만드는 교화서원

너무 죄송해 울면서 가야금을 탔다
이후 남원시립국악단원으로 남원에 자리잡은 송화자 명인. 전주대사습 참방, 우륵전국가야금경연대회 대통령상, 남원 시민의장 문화장, 남원향토문화대상 등 특히 지역을 빛내는 가야금 연주자가 됐다. 자택 1층에 자리잡은 제성가야금산조청에는 늘 제자들이 드나든다. 이곳을 거친 국악인 중에는 아들 이동준(법명 원준) 대금연주자, 이환주(법명 원대) 피리연주자도 있다. 각각 가야금 연주자, 장구재비와 결혼했으니, 국악가문도 5대에 이른다. 

“남원 몽심재, 장수 옛 정화사 복원 등 교단 무대에 아들들과 함께 오를 때 뿌듯하죠. 원불교의 은혜를 갚는 것이 국악인으로서 제 바람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고 나서야 성음의 무게와 깊이, 명인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게 됐으니까요.”

그는 원기78년(1993) 옆집 가정법회를 통해 입교했다. 교회를 다녔던 10여 년이 무색하게 원불교가 너무 좋았다. 당시 두 아이 양육과 국악단 일에 가끔만 출석했던 그. 어느날 한 교도에게 오랜 무결석의 비결을 물었다. “나는 자식 집에 가도 법회 전날이면 딱 와부러.” 그 한마디에 마음을 탁 돌린 후, 11년째 무결석을 이어오고 있다.
 

차 트렁크에 늘 넣어다니는 교전 10권
“이번 문화재 선정도 그동안 소태산 대종사님 공부법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결과겠지요. 그리고 앞으로 더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원기91년(2006) 서위진 교무, 서윤창 교수와 함께 남원 춘향도령 원화어린이예술단(리틀아리랑)을 창단, 가야금, 판소리, 무용 등을 두루 망라했다. 독일과 러시아에 초청돼 스와질랜드 까풍아 우물파기 모금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뜻있는 분들이 떠나면 이어지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 지금도 아동국악정서교육 바우처사업이나 강의를 남원교당에서 진행해 교화와 연결되도록 노력합니다. 리틀아리랑을 되살리는 데 제 노하우와 지역스토리텔링, 제자 인력풀 등 역량을 모으고 싶어요.”
연주할 때는 물론, 가르칠 때도 일원상 진리와 삼학을 바탕으로 지도하는 송 명인. 그에게는 두 가지 유념 조목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교무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일과, 차에 <원불교교전> 10권을 넣어다니며 ‘좀 통한다 싶으면’ 선물하는 일이다. 그가 대표인 ‘제성가야금회’의 ‘제성’도 언젠가 당시 경산종법사로부터 받은 ‘소리로서 세상을 제도하라’는 당부에서 따왔다. 

그의 꿈은 진리와 성음이 다름없는 하나된 삶이다. 여기에, 정통 국악 어린이예술단으로 지역·어린이·문화교화를 다시 한번 펼치고자 기도 올리고 있다. 어린이들의 국악에 실린 원불교문화가 무대에 다시 설 것인가. 대한민국 문화재로 우뚝 선 거장의 꿈을 응원한다.

[2022년 10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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