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오래 전부터 ‘어른이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어른이 없다는 건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조율자가 없기에 가치관의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깨침이 없는 세상은 물질에 쉽게 점령당하고 흔들리기 쉽다. 그래서 자기 이익과 자기 고집에 집착하게 되고, 스승과 어른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른이 꼭 나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태산이 26살의 젊은 나이에 깨침을 얻고서 스승으로, 어른으로 추앙 받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어른이라 함은 스스로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칭한다. 어른은 곧 길을 아는 사람이다. 이를 지도자라 한다.

인류의 흘러온 세월을 헤쳐 보면 ‘요즘 젊은 놈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 만큼이나, 반어적 표현인 ‘어른 노릇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마 소태산도 100여 년 전 그런 고민이 깊었는지 모른다.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을 진단하면서 지도자의 자세를 중요한 교화덕목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지도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기 쉽고, 어른이 어른 노릇을 다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질서를 얻지 못함을 드러낸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어린 교무이거나 나이든 교무이거나 ‘교무’란 호칭에 존경과 존중의 모습을 담는다. 하지만 최근 교무에 대한 신뢰와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세상이 평등해졌기에 그렇다’거나 ‘재가출가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조(自照)하지만 그 씁쓸함은 남는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결국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 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배움에 소홀하고 안일한 시간을 살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교무는 가르침에만 치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가르침을 위해 열배 이상의 배움 시간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현대는 물질개벽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살피고 연구하지 않으면 절름발이 지도자 낙인을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또 지도 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제되지 않은 언행과 편벽된 생각으로 따르는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는지도 살필 일이다. 특히 편 가르기로 대중의 마음에 상처를 남겨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지도 받는 사람에게 사리(私利)를 취하지 말라 했으니, 남을 먼저 이롭게 한 후 나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실행은 교무의 행동 철칙이어야 할 것이다. 일을 당할 때마다 지행을 대조하는 일은 유무념 공부를 하는 원불교 사람이라면 당연지사여야 하지 않을까.

재가 교도들 역시 이 요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22년 10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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