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천 교무
이현천 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신문사에 부임하고 카메라를 제대로 잡아보게 됐다. 교당에 근무할 때도 사진은 찍었지만, 사진을 공부하거나, 구도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몇월 며칠에 무슨 일을 했다’는 기록용 사진만 행사 중간중간 찍어 봤을 뿐이다. 하지만 신문사에 와서 보니 행사 기사에는 현장의 느낌을, 인물 기사에는 그 사람의 분위기를 담아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래서 매일 몇 컷이라도 사진 찍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 카메라로 보는 세상이 눈으로 보는 세상과 다름을 체감하게 됐다. 빛과 그림자, 피사체의 위치, 색감 등으로 사진은 여러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찍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안정감이나 불안감 같은 감정까지 전할 수 있을 정도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처럼, ‘본다(見)’는 것은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 눈은 세계 최고 수준의 카메라이기도 하지만, 신체적 조건에 따라 인지되는 상(相)은 어느 정도 고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메라로 보는 세상은 카메라와 렌즈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물고기 눈처럼 보이는 렌즈도 있고,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확대해서 볼 수도 있고, 심지어 꽃줄기의 솜털까지도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카메라를 통해 세상의 이모저모를 새롭게 보고 있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 보인다’고 한다. 매일 보는 총부도 카메라를 통해 보면 색다르다. 계절의 흐름 따라 변하는 양상을 카메라로 관찰하면 매일 찍어도 새로운 그림이 나온다. 이것은 일견 기자로서 카메라로 바라보는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도, 일도, 세상도 ‘바라보는 눈’에 따라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최근 교단 구성원들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대체로 ‘혁신’, 혹은 ‘내 일이나 잘하자’는 눈으로 양립해 있지 않은가 한다. 물론 혁신의 눈이나 스스로 잘하자는 눈 모두 필요한 눈이다. 하지만 반대의 눈을 외면해선 안 된다. 사람이 카메라를 통해 새로운 시야를 얻듯이 우리 구성원들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얻었으면 한다.

〈원불교대사전〉에서는 ‘전무출신’을 원불교 교단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 노력하는 사람으로, ‘거진출진’은 원불교의 재가교도로서 ‘교규’의 정한 바에 따라 본교에 공헌하는 이로 정의한다. 즉 교단 구성원 전체는 교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시선과 행동은 다를 수 있어도 기본적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세상에 펴기 위해 교단에 모였다는 뜻이다.

‘왜 저럴까?’하는 의문으로 출발해도 좋다. 새로운 시야는 새로운 세상과 생각을 만나게 하고 상호이해와 감사로 이어지게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은 소태산 대종사의 눈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한다.

[2022년 10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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