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어모형 만든 공공근로 월급으로 교당·기관 희사
사경 34권 쓰며 한글 공부, 김화교당 1년 8개월 도움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나이 쉰일곱, 처음으로 원불교 문턱을 넘었다. 문인진 교무의 말을 듣는데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이향중 교도(원기89년 열반)에게 선물 받은 교전을 칼국수 밀다 말고 앉아 읽었다. 띄엄띄엄 갸웃해도 손님 오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나, 교당 나가야겠다.”

잘 운영해오던 칼국숫집도 내놓고 일요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식당이 팔릴 때까지 2만원 벌면 1만원을 교당에 갖다냈다. 그러고도 교당에 뭐가 더 필요한가 먼발치에서 살폈다. 그 세월이 23년째, 화천교당 주정혜 교도의 이야기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고향인 화천지역은 전쟁 전후로 북한과 남한을 오갔고, 덕분에 그 역시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전쟁 후 신발도 없이 동냥으로 밥 먹었고, 학교는 꿈도 못 꿨다. 결혼을 해서도 산 속 초가집에서 고사리 캐고 콩밭을 매며 살았다.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한 노래 가사가 있다죠. 저도 그랬어요. 첫째와 둘째의 소원인 짜장면 한 그릇 시키고는 ‘엄마는 안 좋아해’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둘째가 배탈이 나서 원망도 했죠.”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고, 가까스로 집을 장만하려다가 사기도 당했다. 다만 아이들은 잘 자라 일찍 제 몫을 해주었다. 서울과 인천에 사는 자녀들 집에 가면 교당 못갈까 걱정하는 엄마를 모셔다 놓느라 한밤에도 몇 시간을 달려온다. 원불교 일이라면 아껴서 희사하는 엄마를 응원하는 것도 자녀들이다.

“교당 다닌지 10년쯤 됐나. 교당을 신축해야 한다는데 살림은 뻔하잖아요. 어차피 내가 앉을 자리 짓는 거니까 불사를 했는데, 그게 첫번째였던가 봐요.”
 

주 3회 산천어축제용 산천어모형 만드는 공공근로 월급이라고 해봐야 몇십만 원 남짓. 그런 그의 2천만 원 불사는 강원교구를 넘어 교단에 감동으로 전해졌다. 휴대전화도, 통장도 없이 매달 봉투로 받는 월급. 주 교도는 이 봉투들을 집에 잘 모셨다가 희사할 일 앞에서야 꺼낸다. 말을 아끼는 그 대신 홍혜진 교무가 거든다.

“주 교도님은 지난 달력 한 장도 못 버리는 사람이에요. 식당 밥 한공기도 그냥 두고 나오는 법 없이 알뜰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낡은 봉투를 몇 개나 가져왔어요. TV에서 장애아이를 봤는데 익명으로 돕고 싶다며, 어떻게 해야하나 상의하러 왔더라고요.”

그날 가져온 돈은 1천만원. 얼마나 아껴 모은 것인지 아는 홍 교무는 교단 기관들을 소개해줬다.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주 교도. 교단의 장애인, 미혼모 등 복지기관들을 추려 100만원씩 보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어디서 보았다, 누구에게 들었다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작은 희사라 소문날까 걱정된다”고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이것 뿐”이라고 했다. 

원불교에 아직 갚을 것이 많이 남았다고 말하는 주 교도. 처음 사경을 시작했을 땐 한글을 따라 그리는 수준이라 완경까지 4년이나 걸렸다. 두 번째는 한글이 편해져 23개월이 걸렸고, 그렇게 채운 노트가 34권이다. 올해로 여든, 눈이며 팔이 아파 쓰지는 못하지만 틈만 나면 뒤적이고 또 뒤적이며 손끝으로도 법문을 되새긴다.

“문인진 교무님이 김화교당을 개척할 때 도저히 혼자 못보내겠더라고요. 그래서 땅보러 갈 때도 따라가고, 집터만 세웠을 때도 같이 살며 지켰어요. 교무님 밥이며 군인들 간식도 했죠. 그 1년 8개월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생 곳간 훌훌 털어 내생 전무출신 하겠다는 마음. 우리나라에 겨울이 가장 빨리 오는 강원도 화천. 허나 주 교도의 무상보시는 오늘도 원불교 이름으로 곳곳에 온기를 전한다. 추운 곳마다 말없이 불씨 밀어넣는 공심, 그 덕분에 화천의 마음은 영영 봄볕이다. 

[2022년 10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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