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활동무대는 ‘손길 닿고 발길 머물고 마음 쓰는 그곳’
다양한 활동으로 시작한 교화… 병사 최초 군교화 개척도
“재가출가가 한마음 한뜻으로 신나게 판을 벌여야 해요.”

청산 장연광 원로교무
청산 장연광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잘 왔어. 오늘 나랑 재미지게 놀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인사하는 그의 미소는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해바라기와 꼭 닮았다. 퇴임 후 농촌개발 활동에 전력하고 있는 청산 장연광 원로교무(靑山 張淵光·72)를 찾아갔다. 옛 모습 그대로인 그의 고향집은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시골집처럼 정겹다. 인터뷰 중에도 쉼 없이 울리는 전화 너머로 ‘장 이장님’을 애타게 찾는 마음과 그의 다망함을 알 수 있다.

배운 대로 할 뿐
퇴임을 앞두고, 장 원로교무는 이사병행의 수행터이자 새로운 교화패턴을 만들기 위한 구상을 시작했다. 먼저 했던 생각은 교단의 유휴지를 활용한 주말농장. 당시 정년 연장을 해야겠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의 고향에서 그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왜 전무출신이 교단 속에서만 살아야 하느냐?”며 “우리의 활동무대는 총부와 교당, 기관뿐 아니라 ‘손길 닿고 발길 머물고 마음 쓰는 곳’이라고 배웠다. 배운 대로 실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농촌에서 시작한 원불교. 하지만 사회가 급변하며 교단은 농촌을 잃었고, 현재는 완전히 뒷전이 된 현상을 장 원로교무는 지적했다. 여기에 “교단의 농촌에 대한 정책 수립과 교무들이 퇴임 후에 그동안 쌓은 역량과 인연으로 교화 인프라 구축과 외연을 넓혀 도시와 농촌을 잇는 가교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화합과 발전 꿈꾸는 이장님
장 원로교무가 고향에 내려와 보니 마을 인구의 평균 나이는 85세였고, 가구는 15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노인과 귀농·귀촌한 젊은 세대를 결합한 마을 공동체를 구상했던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첩첩산중이었다. ‘하나씩 해보자’는 생각으로 장수군의 면 단위, 마을 단위의 사업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그는 처음에는 옥수수, 그 다음은 해바라기를 활용해 마을 발전 사업을 이끌었다. 한번은 고향을 찾은 향우회 사람이 2021년에 6개, 2022년에 7개의 사업을 진행하는 장 원로교무를 보고 “이장이 욕심이 많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하기도 했다. 

장 원로교무는 마을 이장뿐 아니라 진전면 주민자치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여기서 ‘상생’과 ‘화합’의 교법이 빛을 발한 사건이 있다. 그는 사실 주민자치위원장 후보에 올랐었다. 교섭이 들어와 수락은 했지만, 한 사람이 많은 직책을 갖는 것에 대한 우려와 그동안 열심히 해온 타 후보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래서 총회 현장에서 “저는 장수군 인문학 강의 재능기부자로 정해졌으니 사양하겠다”는 말로 위원장 자리를 양보했다. 덕분에 혹시 생길지 모를 분란의 씨앗이 제거됐다. 장 원로교무는 그렇게 이장, 자치위원, 도서관 운영위원장 겸 인문학 강의 재능기부자를 맡아 농촌 전체의 화합과 진급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만 해도 보람찬 청년·청소년 활동
모태신앙으로, 숙부인 안산 장인중 대봉도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전무출신을 서원한 장 원로교무는 농촌뿐 아니라 청소년교화와 군교화에도 애정이 많다. 병사로서 군교화를 개시하기도 했던 그. 비결이 있었다. 당시 그는 처음부터 병사들에게 “원불교에 가자”고 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함께하는 분위기를 먼저 조성했다. 그리고 환경보존 운동부터 시작해, 당시 초량교당 이정무 교무와 초량 청년회의 도움으로 부대 내에 방송국을 운영하며 군인 사기진작과 정신교육에 기여했다. 이는 군 사령부에까지 ‘원불교’가 알려지게 했고, 덕분에 매주 일요일마다 초량교당에 갈 수 있는 버스를 지원받았다.

전역 후에는 고려대학교 원불교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돈암교당 청년회를 70명까지 키웠다. 학생·청년 연합법회로 120여 명을 한데 모으기도 했다. 당시 돈암교당 청년회는 단독 의료봉사로서 1979년 충남지사에게 소외지역봉사 ‘청년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또 그는 원청 20주년을 맞아 <원불교 청년회 20년사> 발간을 주도, 기념대회에 3천여 명을 운집하게 했다. “그 책을 들고 수위단회에 보고하러 갔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기념대회 전초 행사로 청년 1천 명과 지리산 천왕봉 등반을 하다가 청년 5명이 방한대책 미흡으로 산 위에서 쓰러졌던 적이 있다. 당시의 기억을 꺼내던 장 원로교무는 “그런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며 환히 웃었다. 그의 청소년·청년 사랑은 법무부의 비행 청소년 선도 위원, 환경부의 환경보존교육 홍보 강사 활동까지 이어지며 삶에 큰 보람이 됐다.

재가와 사회와 더불어
그는 “지금 교단은 산사태를 만나 교화·교육·자선 3대 사업의 강물이 흙탕물이 됐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3대 사업의 강줄기를 맑히는 방법으로 ‘재가가 신나게 활동할 판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했다. 40여 년 전 원불교청년회의 대부흥을 예로 들며, “한마음 한뜻으로 더불어 신나게 판을 벌여준 재가출가 덕분에 당시의 부흥이 가능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수년간 거론된 교화 위기와, 더불어 찾아온 코로나19로 고생하는 후진을 위한 조언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도부는 현장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주력하고, 현장에서는 사회와 더불어 역량을 발휘할 준비를 계속해야 해요.”

[2022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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