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 중구 통합 이끈 장군과 전략가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영웅 이순신은 가장 큰 위기를 가장 큰 승리로 이끌었다. 그와 묶어 부르는 류성룡은 최고의 문신으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활약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승진을 천거했고, 이순신은 류성룡의 전략을 알아보고 귀히썼다. 어릴 적부터 성품과 강점을 잘 알아온 3살 차이 동네친구, 역사를 바꾼 우정이었다.

중구교당 김정상 회장(김경환 ㈜에이치비티 대표)과 김정석 부회장(김금희 ㈜우윤파트너스 대표)도 3살 차이다. 한양대 81학번과 84학번, 김 회장은 이과 공대생, 김 부회장은 문과 법대생이었다. 1984년(원기69) 한양대학교 원불교 교우회(한원회)를 창립하며 싹튼 이들의 우정은 39년째 이 회상을 순항중이다. 몇해 전까지 선배는 성동, 후배는 중구에서 주인으로 살다 각 교당의 위기를 통합으로 극복해냈다.
 

사진 왼쪽 김정상 회장, 오른쪽 김정석 부회장
사진 왼쪽 김정상 회장, 오른쪽 김정석 부회장

 

군대가서도 졸업해서도 나타나던 선배
고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를 따라 각각 원불교에 온 둘, 이들의 꽃발신심은 대학생교화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 어렵다던 동아리방도 따냈고, 축제 때면 원불교용품 전시회도 열었다. 한원회 창립멤버만 17명, 법회를 보면 30명도 넘었다. 

그때의 선배를 후배인 김정석 부회장은 이렇게 기억한다. “동아리방 가보면 군대 갔다던 선배가 기타를 치고 있더라.” 수상한 출몰은 계속됐다. “분명 졸업했는데 때 되면 나타나 이번 축제 때 뭐할까, 훈련 어디로 갈까라며 밥도 술도 사줬다.” 그 밥술 먹인 후배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 졸업 후 ‘한원회를 후원하는 모임’ 한후회를 이뤘다. 81학번 김정상 회장부터 86학번 김신원 원무(하늘교당)까지 열댓명, 하늘이 낸다는 50대 교도회장이 여기서 4명이나 나왔다.

김정상 회장이 크고 호쾌하며 좋은 생각을 밀어붙이는 장군이라면, 김정석 부회장은 일을 되게 만드는 전략가이자 실행가다. 서글서글한 눈매 속에 깊은 지략과 통찰이 들어있다.

서로 운영하는 회사마저도 콘크리트 화학혼화제 회사, 자산운용사로 전혀 딴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맞았다. 선배가 “이래이래 하면 안되겠나?”라고 툭 던지면, 후배는 “그럼 이런 식으로 접근해 해결해 보죠”라며 받는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선배는 손사래를 치는데 후배는 골똘히 생각한다. “호적명이 영 다른데 법명은 김정‘상’, 김정‘석’, 딱 한 글자 차이죠. 아직까지도 배우는 게 많으니 아마 사제지간이었을까요?”
 

한원회 81·84학번, 
너무 달라 잘 맞는 단짝 선후배

임대료 부담,  교화침체 위기를
통합으로 극복
톡톡 튀는 기획…
잠자는 교도·가족들로 출석 늘어

서로 빈 데 채워주는 찰떡궁합, 교당궁합
둘은 자주 만나며 교단의 미래, 교화 희망을 함께 그렸다. 조금씩 양보하고 조금씩 더 하면 빈 곳이 채워지고 더 온전해질 것도 같았다. 돌아보니 두 교당이 꼭 그러했다. 

“서울에서 유일한 임대이던 성동교당은 작지만 젊고 활기찼습니다. 하지만 월세는 오르고 누굴 데려올만한 형편은 못됐죠. 모아놓은 돈까지 축내게 생겼더라고요.”, “오랜 전통의 중구교당은 어른들을 존숭하며 풍류적인 분위기가 있어요.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공간은 마련했지만, 더 이상 교화할 여력이 없었어요.”

불과 3km 거리의 두 교당은 전혀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회사만큼이나 교당을 걱정했던 두 남자의 불면의 밤들, 그리고 결국, 둘의 눈이 맞았다.

“내 것이라는 착을 놓으니 답이 보이더라고요. 젊은 성동과 젊음이 필요한  중구, 공간이 있는 중구와 장소가 필요한 성동. 일단 성동이 중구 소법당에서 법회를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다음 한 해에는 가족초청법회, 체육대회 등 합동법회만 16번 봤습니다. 합창단도 만들었고요.”

일이 되려고 그랬던가. 먼저 중구의 어른들이 품을 내줬고, 성동의 활력이 교당에 훈김을 불어넣었다. 성동에게는 ‘비로소 발 뻗고 앉은 봄날’이었고, 중구에게는 ‘들썩들썩 교화할 맛 나는 여름날’이었다. 봄과 여름 지나니 가을은 금세 왔다. “우리 이미 한 교당 아닌가?”, “이제 그만 2층(대각전)으로 올라오셔~.” 

가을이 되니 오곡백과가 무르익었다. 눈에 띄게 법회 출석인원이 불어난 것. 특히 ‘시설이 열악하다’, ‘또래가 없다’며 쉬던 잠자는 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전에는 출석교도 10여 명, 50여 명이던 성동·중구가 합치니 100명 넘게 법회에 나왔다. 
 

원기69년(1984) 한원회 창립식에서.
원기69년(1984) 한원회 창립식에서.

60여 명이던 교도가 통합하니 100명
“통합하자마자 코로나19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교화단을 살찌우며 하나 되는 데 매진할 수 있었죠. 아마 김은경 교무님 휴대전화에 매일같이 불이 났을 거예요. 일일이 전화해서 알뜰살뜰 다 챙겨주셨으니까요.”

공간과 사람이 준비되니 교화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먼저 우리 가족들을 교화하자’는 흔한 다짐을 중구교당은 해냈다. 자녀들을 대상으로 ‘부모를 위한 기도’를 권선했고, 어버이날에 열린 해제식에 모이도록 했다. 가족 중 의외의 입교구멍(!)이 있는지도 살폈다. 눈높이 맞춘 젊은 교화 결과, 법인절에 총 25명의 사위, 며느리, 손주들이 입교했다.

올해, 김정석 당시 중구교당 회장이 선배에게 ‘회장’을 넘기고 자신은 ‘부회장’을 자처했다. 과감한 변화를  모두가 환영했다. 성동에서 온 김정상 회장이 요직을 맡으니 양 교당 고루 요인이 됐다. 또 한번 ‘내 교당 네 교당’을 넘어선 것이다.      

“신앙과 교당 회복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재미와 온기”라며 한번이라도 교당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비 중인 중구교당. 무인스터디카페와 극장식 대각전, 넓은 소법당을 활용, ‘밴드페스티벌’같은 트렌디한 교화를 추진 중이다.

한원회가 낳은 대단한 단짝 김정상·김정석 교도. 함께 역사를 바꾼 장군과 전략가처럼 둘의 통찰력과 추진력은 교당의 역사, 교화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함께 있을 때 우린 두려울 것이 없었다”고 했던가, 이제 이 인연이 뱃머리를 교화로 돌렸다.

[2022년 10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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