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김선명·차미리·주성하 온라인 강의
평화의 관점, 통일교화의 현재와 과제 짚어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북안동 원불교를 아시나요?

원불교 문화사회부가 옛 개성교당이 있었던 북안동의 역사를 되살린 ‘북안동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11월 7일부터 매주 펼쳐지는 강연으로, 원불교 통일위원회와 (사)평화의친구들이 마련한 자리다. 북한에 대한 이해로 경직된 한반도에 훈풍을 일으키며, 향후 개성교당 복원, 금강산 성적지 개척, 남북 평화통일 공동기도회로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가깝고도 먼 북녘땅, 휴전선에서 지척에 개성교당 역사가 서려있다. 원기22년(1937) 12월 덕암동 덕암정에 불법연구회 개성출장소 간판이 걸렸다. 이듬해 김영신 초대교무가 부임, 청소년들에게 한문, 주산, 작문, 일어 등 중학과정을 가르치며 교화 초석을 닦았다. 이를 원기26년(1941) 2대 이경순 교무가 부임하며 교화 부흥으로 이끌었다. 

북안동 개성교당은 개성출장소 10년 만인 원기32년(1947) 이안봉불했다. 개성시 북안동 16번지(옛 주소 북안동 312-2번지)는 당시 개성에서 제일 큰 요리집인 명월관 건물을 인수한 것이었다. 당시 규모는 대지 499평, 건물 140평에 이르며, 법당에는 2백명이 넘는 교도들이 앉을 수 있었다. 당시 봉불식에는 정산종사와 대산종사가 참석했으며, 800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원기32년(1947) 7월3일 북안동 개성교당 이안봉불식에 800명이 넘게 모였다.
원기32년(1947) 7월3일 북안동 개성교당 이안봉불식에 800명이 넘게 모였다.

개성교당의 교화는 날로 비약했다. 원기35년(1950) 기준 입교자는 616명, 원명부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교도수는 635명에 달했다. 불안한 시기에도 법회 평균 출석수는 100명이 넘었고 전무출신도 9명이 배출됐다. 젊은 교도들이 금강청년단을 조직, 개성 특산물 인삼을 다듬은 자금으로 직조공장을 설치했다. 수입이 생기자 수양원(양로원)을 설립하고, 역시 직조작업으로 노인들이 생활 기반을 마련하도록 했다.

하지만 원기35년(1950) 6월 25일 비극이 시작됐다. 이순석·송달준 교무와 교도 몇 명은 교당을 사수하고자 끝까지 노력했다.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 등에서 교당을 압수하려고 찾아오면 돌려보내기를 36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갖은 고초로 고생하다 9월 28일 수복과 이듬해 1·4후퇴 때 마지막 인원들이 총부로 내려오며 개성교당 교화는 멈춰지고 말았다. 이후 개성교당은 폭격으로 파괴된 후 북안동 전화국으로 쓰이고 있음이 원기90년(2005)에 확인된 바 있다. 

북안동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북안동 아카데미는 총 4주차로 진행된다. 11월 7일에는 김병로 교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가 ‘통일을 대비한 종교계와 원불교의 역할’을 강의했으며, 14일에는 김선명 교무(영광교구장)가 ‘평화통일을 향한 원불교의 역할과 방향’을 전했다. 21일에는 차미리 팀장(북한인권시민연합)의 ‘북한의 교육제도와 청소년 심리이해’, 28일에는 주성하 기자(동아일보)의 ‘원불교 북한동포 지원사업과 통일교화를 위한 제안’이 진행된다.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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