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의 정답을 ‘적재적소(適材適所)’라 한다.

그래서 인사는 어렵다는 하소연이 흘러나온다. 흔한 말로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능력치를 안다한들 얼마나 알겠는가. 또 능력치와 태도는 별개의 문제이기에 다수 구성원 속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모든 걸 감안해 인사배치를 하더라도 특혜 시비 역시 피해가기 힘들다. 특히 평생 교단 안에서 살아가는 전무출신에게 인사는 일생에 몇 번 없는 기회이며, 능력과 태도와 친소 등이 얽힌 복합 방정식이기에 더욱 어렵다.

그런 인사시기가 돌아왔다. 떠나야 하는 사람은 벌써 막막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고, 떠나보내는 사람 역시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래 인사라는건 일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절차이지만, 새 사람 만나 살아가는 것이 더 걱정인 게 우리 인사의 현실이다. 이는 젊은 전무출신일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인사를 역이용해 일은 뒷전이고 내 살 곳만 찾기에 골몰한다면 참 곤란하다.

인사시기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말이 ‘청탁’이다. 이는 인사 대상자 개인의 사정을 고려하기 보다는, 누구의 입김에 의해 좋은 자리로 옮겼다는 소문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1위는 ‘모 원로교무가 자기 제자를 좋은 자리에 앉히기 위해 힘을 썼다더라’는 소문이다. 물론 아끼는 사람을, 또 그의 능력을 잘 알기에 자리를 추천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청탁이 다수의 구성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긴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자중을 당부한다. 우리는 모두 소태산의 평등한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 사람 챙기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면서 인지상정을 어찌 물리치겠는가. 특히 종교가는 사람을 살려 쓰는 일이 우선이고 보살핌으로 그 앞길을 열어주는 것이 당연한 자비심의 발로이니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자칫 이런 사소한 자비심이 일을 그르치게 하고 불평등과 불신의 둑을 쌓는 게 된다면 얼른 허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소한 정을 칼날처럼 끊을 줄 알아야 교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인사 거부자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휴무’나 ‘자퇴’라는 단어가 쉽게 등장하고 있다. 이게 마치 협박의 도구로 이용되어 인사원칙을 흔든다면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 인사권자가 이를 걱정해 인사 대상자의 마음을 채워줄 조건을 수락한다면 아주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특히 마음씨 좋은 인사권자들에게 떼쓰는 것이 가장 좋은 비책이 된다면 교단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음을 명심하자.

인사는 교단 미래를 설계하는 지형이다. 따라서 효율성과 전문성이 고려되어야 하며, 공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에 인사는 테트리스가 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만나 시너지를 내면서 폭발성을 가질 때 교단발전도 기약할 수 있다.

[2022년 11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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