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방앗간·솜틀집 역사 잇는 며느리
‘촌’이 가진 가치, 촌스럽지 않게 담아
“지역과 함께, 요즘 청년도 좋아하게”

향촌당의 외관. 지붕 위로 솟은 작은 지붕은 이곳이 방앗간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향촌당의 외관. 지붕 위로 솟은 작은 지붕은 이곳이 방앗간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남편은 떡을 싫어한다. 어릴 적, 집이 방앗간을 해서다. 

시아버지는 방앗간 옆에서 솜틀집을 했다. 평생 뿌연 솜먼지와 100살 넘는 조면기(목화씨를 발라내는 기계)를 벗으로 두고 산 분이었다.

이 이야기들이 ‘현재’에도 숨 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간이 사라진다면 공간에 담긴 이야기도 사라지는 게 수순 아니던가. 정작 시댁 식구들은 너무 익숙한 공간이라서,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듯했다. 

‘건물을 팔아버리면 없어질 이야기’가 못내 아까웠던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찾아가 이곳에 새롭게 담아낼 꿈을 전한다. 그리고 매매 계약 직전, 허락을 받아 공간을 지켜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어찌 보면 단순한 한 생각에서 비롯된 향촌당(鄕村黨). 오래된 공간과 그곳에 담긴 이야기의 가치를 알아본 비결을 전미향 대표는 “제가 좀 촌스러워서”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제 향촌당은 그 촌스러움 덕분에 ‘촌’스러움의 창구가 됐다. 그렇게 지역을 담고,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시아버지와 평생 동고동락한 130년 된 조면기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옆에 전미향 대표가 나란히 섰다.
시아버지와 평생 동고동락한 130년 된 조면기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옆에 전미향 대표가 나란히 섰다.

공간이 가진 역사를 잇고자
시댁은 하나의 건물을 간이 벽으로 나눠 방앗간과 솜틀집을 했다. 두 가게를 함께 시작한 것이 1967년이라고 해, 전 대표는 향촌당 역사를 ‘since 1967’이라고 쓴다. 하지만 실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건축물이라 100년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 

향촌당은 직역하면 ‘고향과 농촌을 지키는 무리들’이라는 뜻인데, ‘농촌에서 여러 명이 같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돼 이름 지어졌다.

공간의 재 활용을 두고 가장 고민하던 건 당연히 채울 내용이었다. ‘예전에 이곳에서 하던 사업을 이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그는 방앗간 역사를 잇는다는 의미로 직접 짠 들기름과 참기름, 그리고 직접 볶아 만든 미숫가루를 선택했다. 솜틀집 역사는 시아버지가 쓰던 130년 된 기계를 카페 한가운데 전시하는 것으로 살려냈다.

나름의 고집도 고수한다. 향촌당에서 만드는 들기름과 참기름의 원물로 ‘의성산’만 쓰는 것. 장날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로 좌판을 펼치던 어르신들이나, 알음알음 소개받은 지역민들의 참깨와 들깨를 수매해 로컬의 가치를 담는다. 양이 부족할 땐 거래처의 도움을 받는데, 이때도 원칙이 분명하다. “무.조.건. 의성산으로 구해주세요.” 로컬(지역)을 담아야 향촌당이 만드는 제품으로서 의미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역 농산물로 만든 방앗간 오곡라떼, 방앗간 흑임자라떼, 오미자 에이드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다시 말하면 향촌당은, 카페이자 로컬푸드 매장인 셈이다.
 

성실함에 더해진 노력
최근, 전 대표가 어느 창업교육에 강의자로 섰을 때의 일이다. 동행했던 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내용인즉 이랬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해야지. 그래야 그분들도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하고 힘을 얻을 거잖아.”

딸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성실함과 노력을 지켜본 이 아니던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지난 시간을 살폈다. 여러 수상과 수료 내역이 2년간 성실하게 걸어온 그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마음 자세를 바꾸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홍보를 잘 안 했어요. 왜 그랬나 생각해보니, ‘주문이 많이 들어오면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먼저 하느라 그랬더라고요.(웃음)”

창업 형태에 있어서도 개인의 이윤만을 추구하고 싶지 않아 ‘사회적기업’이라는 방향을 선택한 그. 덕분에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일을 여럿 경험했고, 다양한 교육과 지원을 통해 차곡차곡 성장해올 수 있었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딸 또래 세대가 좋아하게
의성이 고향인 그는 창업 전,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50이 넘었으니 어차피 퇴직까지 몇 년 안 남았는데, 이 일은 평생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과감히 직장을 그만뒀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생각은 이랬다. ‘식구들이 같이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거기에 고향 청년들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에 전 대표는 서울에서 회사 다니던 딸을 의성으로 불러들였다. 미대 출신인 딸은 엄마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고, 전 대표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큰 힘이다. 그래서 그는 인테리어나 메뉴 등의 기준을 ‘우리 딸이, 또는 우리 딸 또래 세대가 재미있어하고 좋아할 만한 것’에 둔다.

그 마음이 청년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실제로 향촌당 덕분에 의성전통시장을 찾는 젊은 층이 늘었고, 그를 벤치마킹해 카페를 열거나 참기름·들기름을 만드는 지역 청년도 많아졌다. 이를 전 대표는 ‘뺏겼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역 청년들이 잘 되면, 그게 지역을 살리는 또 다른 힘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작은, 시댁의 역사가 어린 공간에 담을 작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꿈은 이제 ‘지역과 함께’라는 더 큰 꿈이 됐다. 향촌당에는 맛과 정성은 물론이고, 청년과 어르신, 무엇보다 ‘지역’이 있다.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2년 11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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