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 의병장·고위 관료 지식인·독립운동후원가 등 인물 배출
지식인으로서 사회·세상·역사와 소통하며 새로운 길 도모
“종교라는 범주를 넘어서 그 안의 본질과 핵심을 찾자”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근대한국개벽종교답사단(이하 답사단)이 11월 25~26일 1박 2일 일정으로 순창과 남원을 방문했다. 이중 이번 호에서는 답사 첫날 찾은 순창에서 조선의 항일 의병부터 동학농민혁명, 독립운동 등 근현대를 흐르며 이어지는 의기를 살핀다. 순창 답사 발걸음은 순창객사(옥천지관), 여암 신경준 선생 묘역,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터, 구암사, 녹두장군 전봉준관(전봉준 장군 피체유적지) 등으로 이어졌다.
 

면암 최익현 등 조선의병이 진을 쳤던 순창 구암사.
면암 최익현 등 조선의병이 진을 쳤던 순창 구암사.

칠순 노공이 분연히 일어나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으로서 손님이나 사신이 머무는 곳으로 쓰이기도 하고 새로 부임한 수령이 참배, 국상이 나면 망배를 행하던 주요 공관이다. 이번 일정의 첫 번째 답사지인 순창객사는 면암 최익현, 임병찬 의병장이 항일 의병 본부로 사용하다가 붙잡히게 된 역사의 현장이다.

면암 최익현은 74세의 노구에 임병찬 의병장과 함께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 정읍을 지나 순창 구암사를 거쳐 순창에 들어왔다. 당시 면암을 따르는 의병의 수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일본군이 아닌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가 순창을 포위했고, 임병찬과 최익현은 “일본과는 싸우겠지만 같은 피끼리 어떻게 싸우겠는가” 하며 체포돼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둘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됐고 74세의 노선비는 1906년 12월 31 순국했다. 임병찬은 이후 1914년 대규모 의병 전쟁을 준비하다가 실패하고, 1916년 거문도 유배 중 순국했다.
 

호남실학의 거목, 여암 신경준
순창객사에 이어 들른 곳은 여암 신경준 묘역이다. 여암은 순창 출신으로 18~19세기로 이어지는 호남의 정신사·사상사·철학사의 뿌리이자 연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며 임금과의 경연, 정책 조언 등을 맡았고, 학문적으로는 문자학과 성운학, 지리학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 실학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8년의 전쟁을 거치며 초토화된 국가를 맞이한 지식층의 고민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가운데 태어났다. 조선 성리학은 건국 초기의 사상에 고여있지 않고 달라지는 사회, 역사적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발전해왔다. 여암 신경준 묘역에서 답사단은 초토화된 나라의 지배층이자 지식층으로서 어떤 책임감과 고민을 안았을지, 또 세상과 사회와 역사와 어떻게 소통하며 새로운 길을 도모했을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민족변호사에서 초대 대법원장으로, 가인 김병로
조선시대 인물을 들여다 본 답사단은 근현대사 인물인 가인 김병로의 생가터를 찾았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 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호를 펼친 인물이다. 가인은 독립운동가 변호 외에도 교육, 언론, 물산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박민영 박사(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는 가인 김병로에 대해 “독립운동전선에서 활동한 사람을 뒤에서 지지하고 후원한 대표적인 인물로, 해방 후에도 가인에 대한 평가들은 굉장히 순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가인은 초대 대법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대법원장 재직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이승만 등 정권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대쪽 같은 삶을 살았다. 그 삶의 경로에 대해 박 박사는 “가인의 삶에 나타난 정신적 기저는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어린 시절부터 만나고 교류한 시대의 어른들이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말년까지 꼿꼿한 삶을 일궈왔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역사를 덧칠해버린 흔적
마지막 답사지는 녹두장군 전봉준관이었다. 이곳은 전봉준 장군 피체(남에게 붙잡힘) 유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후인들의 실책으로 역사가 덧칠된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피체유적비 하단에 새겨진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라는 부분이다. 김경천은 전봉준 장군의 공식적인 체포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실제로 패퇴 후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 순창에 숨어든 전봉준 장군을 직접 습격, 붙잡히게 한 장본인은 순창의 선비 ‘한신현’이다. 이는 공식 기록에 남아있는 내용인데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김경천이란 인물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신과 습격이 이뤄진 배경에는 당시 조선에 패퇴한 동학군을 잡기 위해 일본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동학군에게 호의적이던 향촌 사회가 ‘동학군을 잡아야 우리가 산다’는 분위기로 돌변, 전봉준 장군은 결국 안타까운 최후를 맞게 됐다. 

또 이 유적지는 전봉준 장군이 실제로 붙잡힌 곳이 아니기도 하다. 이처럼 후인들의 욕심으로 덧칠된 전봉준 장군의 최후 유적에서 답사단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개벽종교의 본질을 찾아
동학과 증산교, 대종교 그리고 원불교 등 근대한국개벽종교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특히 원불교는 1세대 가운데 동학과 관련된 인물들이 많고(이재철, 이현도, 조송광, 최수인화 선진 등), 당시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제자가 된 사람 가운데 ‘수운의 갱생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한 이가 있었을 정도로 초기의 원불교는 동학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했었다. 

이런 사상적 흐름에 대한 의견을 모으며 순창에서 좇아온 한반도의 정신적 에너지와 움직임을 읽고, ‘종교라는 범주를 넘어서 그 안의 본질과 핵심을 찾는 것이 답사의 목적’임을 되새겼다.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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