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서 “새로운 시대, 미래를 꿈꾸자”
선국사서 품어낸 동학이 새로운 시대를 열다
우리 시대의 ‘혼불’은 어떻게 전해질까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근대한국개벽종교답사단(이하 답사단)이 11월 25~26일 1박 2일의 일정으로 떠났던 답사 둘째 날. 답사단은 남원을 찾았다. 남원에서는 지리산 실상사, 남원교룡산성, 은적암(덕밀암), 만인의총, 혼불문학관을 들러 불교와 동학, 민중과 예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생명평화 결사운동의 발상지
대부분의 사찰과 다르게 너른 들판 가운데서 답사단을 맞이한 실상사. 이곳은 828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척 스님이 개창했다. 당시 통일신라의 흥덕왕과 태자가 귀의하고 후원한 왕실의 사찰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시기에 한반도에 선종의 씨앗을 심은 실상사와 8개 사찰은 ‘구산선문’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그 시기 한반도의 사상적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답사단은 이곳에서 생명평화 결사운동을 펼치는 도법 스님을 만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했다. 도법 스님은 답사단에게 “영성·생명·문화의 가치를 드러내고, 코로나19를 겪으며 얻은 적정 규모와 거리, 소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새로운 시대의 미래를 꿈꾸자”는 제안을 건넸다.
 

답사단이 남원 실상사에서 도법 스님과 문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답사단이 남원 실상사에서 도법 스님과 문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품어서 지켜온 남원교룡산성·선국사
남원교룡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됐다. 삼국시대,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때 모두 이곳을 뺏거나,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안에는 선국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의 주지였던 혜월스님은 영남에서 피신한 수운 최제우를 보호하고 그가 동학의 가르침을 펴는 데 지지를 보냈다. 덕분에 수운이 경상도에 이어 전라도까지 동학의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고, 선국사가 품어 키워낸 동학은 전라도와 전국에 퍼져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 선국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은적암(덕밀암)이 있는데, 덕밀암이라는 이름을 수운이 기거하며 은적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경상도에서 수운은 <포덕문>을 지으며 ‘악질만세 민무사시지안(악질이 세상에 가득차니 백성들이 편안할 때가 없다)’는 표현으로 시대를 진단했다. 그리고 이곳 남원에서 <동학론>이라는 글을 집필하며 그의 깨달음에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경대전>의 핵심은 <동학론>에 있고, <동학론>의 핵심은 侍(모실 시)자의 해설에 있다. ‘내유신령 외유기화’가 그것이다.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은 이를 “내 안에 이미 신령(영성)이 있으니 이를 회복하고, 밖으로 그것으로 가득 차게 만들자는 종교적이고 사회 실천·혁명을 품은 동학의 핵심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만여 명의 의로운 선열을 기리며
이어 답사단은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이자 1만의 호국영령을 모신 사적지, 만인의총을 찾았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5만 6천의 대군을 이끌고 남원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당시 남원성의 군대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 명나라 부총병관 양원의 3천 병사, 총 4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1597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4천의 병사와 6천의 남원 성민이 장렬히 순국했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온 남원 성민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큰 묘에 합장해 모신 것이 만인의총의 효시다. 이후 1612년 광해군 때 충렬사라는 사당을 짓고, 1653년 효종 때 충렬사에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을 내린다. 매년 9월 25일(남원의 모든 성민이 순국한 날) 이곳에서 순국선열을 위로하는 제향을 425회째 이어가고 있다. 

원래의 만인의총은 구 남원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곳이 옛날 남원성의 북문터이자 정유재란 당시 최후의 항전을 하던 곳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곳이기에 묘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후 400여 년이 흐르고 만인의총 주변에 환경이 좋지 않게 됐다. 1962년 남원에 큰 수해가 났을 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문했고, 이때 남원사람들이 만인의총의 이장을 건의해 1964년 왕봉산 기슭에 지금의 만인의총을 이장했다.
 

답사단은 남원교룡산성•선국사에서 새로운 사상을 품어 키워낸 불교의 너른 품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답사단은 남원교룡산성•선국사에서 새로운 사상을 품어 키워낸 불교의 너른 품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문학과 예술이 가진 강력한 힘
혼불문학관은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을 주제로 해 지은 문학관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최 작가 아버지의 고향에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혼불>의 주요 내용이 디오라마(모형)로 재현되어 작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됐다.

최 작가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혼불>은 1930년대 이 마을 종갓집의 이야기를 각색해 담은 소설이다. 1981년 동아일보에서 장편소설로 1부가 연재됐고, 이후 2~5부가 17년간 연재돼 한국 대하소설계의 새역사를 장식한 바 있다.

소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로 최 작가가 일생을 걸고 한국과 한민족을 정밀하게 들여다본 작품이다. 세시풍속·관혼상제·음식·노래 등 풍속과 문화사를 철저한 고증으로 ‘복원’했다.

이러한 집필 과정에 대해 최 작가는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았다”고 묘사하며 그 고충을 전했다. 한 시대를 되살리고 한국 문학의 수준을 몇 단계나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 작가의 작고로 끝내 미완으로 남게 됐다.

수많은 학자가 연구와 고증을 거쳐 써낸 훌륭한 논문도 중요하지만, 한 명의 작가가 써낸 훌륭한 소설은 수십, 수백만이 읽고 그 정서를 공유하고 전달한다. 답사단은 문학과 예술에 담긴 위대함과 감동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전해지는지, 또 유구히 이어갈 우리의 정신적 문화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올해의 근대한국개벽종교답사를 마쳤다.

[2022년 12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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