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다니던 청년은 ‘불교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만난 <원불교교전>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이미 불교의 현대화를 이뤄놓았음을 발견했다. 마침 친구의 소개로도 알게 된 원불교의 실상은 그의 생각과 딱 맞는 공동체였다.

아침 좌선을 마친 후 괭이와 연장을 메고 일터로 나가고, 보수를 따로 받지 않는다는 점에 감동한 청년은 그길로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찾아왔다. 인생의 방향을 새로 잡은 그 청년, 바로 벽산 김종천 원로교무(碧山 金宗天·75)다.
 

분야를 뛰어넘는 ‘벽산 스타일’
대승불교 초창기에 모여든 종교 천재들이 엮어낸 <금강경>은 여러 백 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현대에도 많은 스님과 명사들이 이 경전을 시대에 녹이기 위해 많은 책을 냈다. 그러나 여러 책을 찾아보던 김종천 원로교무에게도 몇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랜 세월 다뤄져 온 <금강경>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다뤄주는 책은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본인이 연구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벽산 스타일’ <금강경> 해설서 <누구를 위한 종소리>를 펴냈다. 

그가 말하는 ‘벽산 스타일’은 단순히 불교에서의 관점만 종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들며 <금강경>에 담긴 메시지를 현대에 맞게 ‘터치’한 것이다. 이런 다양한 관점과 분야를 넘나들 수 있던 배경에는 젊은 시절 만났던 양주동·이기영 교수의 영향이 컸다. 두 교수는 <논어>에 샹송을, <대승기신론>에 공산당 선언을 함께 다뤘다. 그들이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고경(古經)을 풀어내는 모습에 김 원로교무는 감동을 받았고, 그 학풍을 이어받게 됐다.
 

모두를 은혜로 돌리는 심법
김 원로교무는 그때부터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사유를 추구했다. 원불교를 찾아온 이후에도 그 기질을 참지 못했던 그는 마침 미국에 있던 누나의 권유로 형제이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원불교학과 수학을 마치고 미국을 향해 해외교화 1세대로서 발걸음을 내디딘 그. 김 원로교무는 “거창한 서원이나 그런 건 없었고, 다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게 로스앤젤레스교당에서 부교무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30년 동안 미국교화 1세대로 벨리교당, 덴버교당, 샌프란시스코교당 등에서 일원의 법음을 자리 잡는 데 힘썼다. 지금도 해외는 그렇다지만, 당시도 그는 교당 유지를 위해 여러 사업을 했다. 매일 물건을 떼오고 배달하느라 바꾼 차만 해도 7대나 된다. 김 원로교무는 “아마 내가 원불교에서 자동차 운행거리가 가장 많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간난하던 시절에 대해 그는 “천성이 그런건지 특별한 고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미제(미국음식) 먹고 산 것, 건강도 상하지 않았고, 가정에도 우환이 없었으며, 교도들도 협조를 잘해준 것 등. “모두 사은의 은덕이죠. 근무하면서 경제적인 고(苦)가 없었어요.”
 

“교화는 감동 줘야”
미국교화 1세대로서 김 원로교무는 합리와 실용주의적인 서구사회에 원불교의 교리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다만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 그는 “현지인의 사고를 충분히 이해하고, 교화 대상을 잘 연구해 접근하자”고 제안했다.

따끔한 지적도 이어졌다. 김 원로교무는 “교화는 곧 감동을 주는 것”이라며 “아직 우리는 중앙총부가 자리한 익산에도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에 감동을 줄 수 있겠냐”며 ‘감동 주는 종교’를 거듭 강조했다.

또 그는 ‘열정’을 언급했다. 일례로 그는 자녀들을 이웃종교 예배 등에 참석하게 한 후, 그 감상을 전해 듣곤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현장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이웃종교 성직자들이 강단에서, 평상시 태도에서 보이는 열정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원불교 교화에서 법회와 설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교무’로부터 배어 나오는 혼신의 열정이 대중에게 감동으로 다가가는 데서 교화가 시작된다”고 강조하는 김 원로교무다.
 

‘가난은 선비의 재산이라’
김 원로교무는 후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 연암 박지원과 형암 이덕무를 꺼냈다. 형암은 정조 시대 실학자로 그 능력과 학식이 깊었지만 서자 출신으로 가난함을 면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연암은 임금(정조)에게 형암의 생활이 어려우니 보조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그러자 정조는 “가난은 선비의 재산이다. 배부른 자가 어찌 학문을 하겠는가”라며 청을 물렸다. 형암의 능력과 성품을 깊이 아끼면서도, 그의 선비로서의 청빈한 삶 역시 존중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김 원로교무는 “전무출신 역시 가난(청빈)이 재산이에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눈물에는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 아닌 고고하고 꼿꼿하게 옳은 길을 향하는 청빈한 정신이 우리의 재산이란 뜻이 담겨있다.

최근 후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김 원로교무는 안타깝게 여겼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다 보니 당연히 ‘가난’은 불편하죠. 그래서 그 가난을 넘어설 정신적 재산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우리의 사명감이고 열정이자 생명이죠. 그러한 정신적 재산이 없으면 존재 의미도 없어요.”

그의 마지막 말이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해져야 해요. 부끄러움 없는 ‘자발적 거지(가난)’가 되어 청빈과 우아함으로 감동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2022년 1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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