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마지막을 혼돈의 죽음으로 끝낸다. 남해와 북해의 황제가 만났다. 중앙의 황제인 혼돈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자, 그들은 어떻게 보답할지 의논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통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 그러나 혼돈만 그런 구멍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뚫어주자.” 그들은 매일 구멍을 하나씩 뚫었고,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죽었다.

장자의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북해의 큰 물고기가 변화하여 큰 붕새가 되어 남쪽 바다로 향해 간다. 새가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바탕에는 큰 공기, 즉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공기가 무수히 많이 쌓인 것이면서, 저 멀리 경계를 알 수 없는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붕새는 너무도 크고 그 능력이 대단하지만, 하늘의 양력 없이는 날 수 없다.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도, 실은 하늘의 바탕이 없이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늘의 소리를 들었는가. 피리는 구멍을 통해서 소리를 낸다. 대지의 다양한 모양은 바람에 의해 그 소리를 낸다. 텅 빈 하늘은 모양 없는 모양의 구멍에서 그 소리를 낸다. 모든 존재가 힘을 발휘하기 위한 바탕인 하늘은 텅 빈 듯 하지만, 실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비어 있음, 그리고 가득 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하늘은 두 모습을 오고 가고, 또한 언제나 두 속성을 함께 한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보고 듣고 만지면서, 세상과 연결된다. 또한 살아 있음은 숨을 쉴 때 가능하다. 사람의 머리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눈 둘, 코 둘, 귀 둘, 입 하나 이렇게 있다. 이 구멍으로 보고 듣고 숨 쉬고 말한다. 하늘이 이 구멍을 통해 드나든다. 생명의 힘이 이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때, 삶과 죽음은 교차하며, 무한한 힘이 불꽃처럼 이 몸을 살게 한다. 문득 내 피와 살의 근원을생각해보면,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다. 어제까지 살아있던 풀과 곡식,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짐승마저, 이제는 나의 몸으로 변화하여 사라진다. 지금은 살아있는 나 또한 죽어서 어느 짐승의 먹이가 되고, 풀의 비료가 되며, 수없는 미생물의 양분이 된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아는 것이 정말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자,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다. 이렇게 돌고 도는 삶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저 거대한 붕새마저 하늘 없이는 날 수 없다. 이렇게 앎이 있어도 역시 하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바탕이 무엇인가?

생각이 없으면, 이미 바탕과 하나이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면, 그 바탕과 내가 나뉜다. 하지만 생각 역시 하늘의 소리 아니겠는가? 본래 하나인 내가 구멍이 생기고 생각이 생기면서 나를 잊었구나.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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