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수행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자유는 비움이 기반될 때 가능하다. 이 비움은 영롱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몰입에 의한 비움이어야 한다. 이때 몰입은 수많은 마음을 한 데 모아 한마음이 됐다가 저절로 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한마음의 초점이 단전에서 되면 마음이 편안할 뿐 아니라 몸 건강에도 이롭다.

마음을 단전에 모으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단전기운을 느낄 정도로 단전이 단련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단전에 스며들어 숙성된 기운을 벗 삼을 수 있다. 이어 선정에 들었다가 출정할 때는 자신의 진리 인식에 비례해 지혜가 열린다. 선 수행과 더불어 진리, 교리, 성리 등의 연마가 필요한 이유다.

비로소 진정한 수행의 서막이 열린다. 수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가 온몸으로 스며들어 동물적 감각으로 나타나고, 천지가 되어 천지를 진정으로 알기까지 한다. 나아가 알고 싶은 것들이 저절로 열리는 데 이른다.

그래도 이는 쉬운 편이다. 진리의 숲과 흐름 그리고 인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훨씬 어렵다. 내면의 일대사를 해결할 때, 수행의 지평을 넓히는 땀 저린 체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어 그동안의 수행을 보림으로 내면화하고, 내면화된 진리를 도광산채로 수위를 높여가며 세상에 토해내야 한다. 이로써 동정간에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세상과 하나의 기운으로 통할 뿐 아니라 세상의 큰 물결을 짚어 심신을 운용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비고 자유다.

몇 년 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교당에서 한 미국인 선객이 “자비와 자유에 이르렀을 때, 자비와 자유에 순서가 있습니까?”를 물었다. 나는 “아닙니다. 한 덕목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선객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쉽지 않은 견해인데요? 한국에서도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했더니 “레번 길의 설명이 예수님의 성도과정과 비슷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놀랐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성도과정을 다루는 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 한 인간이 수행을 해서 심신의 자유를 얻어 육도를 자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주에 창의적 생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 그러니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원불교가 영적 존재들이 압축된 인간의 삶에서 혜명의 등불을 면면이 이어 자유를 얻는 수행이 살아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 혜명의 등불은 세상에서도 인지의 등대가 되어 주니 없어서는 안 된다. 고등종교의 본의는 교도 수, 큰 건물, 높은 직책, 오래된 관습보다 수행으로 밝힌 혜명의 등불을 이어가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원불교의 혁신도 다가오는 인지에 맞게 다양한 사람 다양한 형태의 혜명의 등불이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빈 껍질에 불과하게 된다.

[2022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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