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의 나이에 60년 째 50년 넘도록 한 자리 지켜
버려진 미싱에도 다시 숨 불어넣는 ‘미싱 수리 박사’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올해로 여든의 나이. 그 가운데 60년을 미싱과 함께 살았다.
1970년에 문 연 가게도 50년 넘도록 같은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아직 숨이 살아있는 100년, 120년 된 미싱이 있다. 이곳에서 웬만한 ‘몇십 년’을 가지고는 차마 고개 내밀지 못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모든 숫자가 증명하고 가리키는 하나. 바로 이곳을 지켜온 장태춘 한일미싱상회 대표다. 그만의 꾸준함과 성실함은, 120년 된 미싱부터 현대 기계식 미싱까지 고치지 못하는 게 없도록 만든 비결이다. 장 대표는 이를 ‘꾸준히 내 성격대로’라고 표현했다. (미싱은 재봉틀의 일본식 표현이지만, 본 글에서는 어감을 살려 그대로 사용한다.)

 

다른 일은 못하겠다
미싱과 인연이 시작된 건 만 열아홉 살. 1962년, 당시 사촌 형은 광주 충장로에서 미싱상회를 하고 있었다. 충장로에는 미싱상회 대여섯 개가 즐비했다. 장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수입과 조립에 의존해 유통되던 미싱이 완전한 ‘국산’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게 1960년대. 그도 딱 그쯤 미싱과 연이 닿은 것이다.

적성에 맞았다거나, 이 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성실함이 있었다. 심부름하고, 먼지를 닦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싱 수리 기술도 배웠다. 군대를 다녀온 후 철공소로 잠깐 일탈(?)을 해보았지만, 이는 오히려 ‘다른 일은 못하겠다’를 명확히 아는 계기가 됐다. 마침 사촌 형수가 그를 다시 찾았고, 그렇게 8년을 채운 후 ‘내 가게’를 차렸다. 

가로 길이 50㎝ 남짓한 미싱에는 100여 개에 달하는 부품이 쓰인다. 달리 말하면, 미싱 하나를 제대로 다루려면 100여 개의 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그 앎의 개수를 단박에 채우지 않았다. 누군가 미싱을 고쳐달라고 가져오면 그때 하나를 알고, 또 다른 미싱을 고치며 둘을 알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더해진 노하우가 그를 ‘미싱 수리 박사’로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와서는, 부속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고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또 미싱과는 찰떡 궁합이라서, 여든의 나이에도 실을 이로 잘라 바늘에 끼우는 데 안경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밝고 이도 튼튼하다.
 

 

“바보미싱”
장춘일 대표는 오래돼도 튼튼한 미싱을
‘고장날 줄 모르는 바보’라고 했다.

한 자리 지킨 뚝심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싱은 필수 혼수품목에 속했다. 집집마다 미싱 한 대쯤은 갖추고 있었고, 천을 소재로 하는 웬만한 생활용품과 의류는 어머니들의 손에 의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집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의류 산업이 발전하면서 1990년대부터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 게다가 옛날에 생산된 미싱은 워낙 튼튼한 덕분에 고장이 나지 않았다. 미싱을 찾는 이는 줄고, 미싱을 가진 가정에서는 굳이 새것을 살 필요가 없었다. 미싱 시장은 자연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렇대도 그는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미싱 수리 기술이 있었다. 미싱 수리를 위해 어쩌다 찾아오는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내(그는 광주시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시내 손님’, 시외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시외 손님’이라고 표현했다)에 “미싱을 고치려면 한일미싱상회로 가면 된다”는 말이 자자히 퍼졌다.

그러던 중 2010년 한 방송에 소개됐다. 이후 서울, 인천, 강원은 물론이고, 어느 섬에서까지 미싱 머리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이들이 언제 어떤 시간에 올지 몰라서, 그는 주말은 물론이고 명절까지 1년 365일 내내 가게 문을 연다. “시내 손님은 다음에 다시 올 수 있지만, 시외 손님은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찾아오는 건데 문이 닫혀 있으면 얼마나 허망하겠냐”는 것이다. 혹 허탕 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셈이다.

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리비를 최소만 받는 건 당연하고, 어떨 땐 작은 미싱 부품 하나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찾아와준 것이 고마워 부품비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밥까지 사 먹여 보낸다. 그 마음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죽지도 말고, 어디 가지도 말고, 이 자리를 지켜달라”고 말한다. 돈보다도, 그 말이 보람이라는 장 대표. 그 재미 덕분에 그는 앞으로도 가게 문을 계속 열어두고자 한다.
 

버려진 재탄생
누군가 버린 미싱도 그에게 오면 쓰임 있어 진다. 정말 사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부속을 알뜰히 챙겼다가 다시 쓰일 곳을 찾아준다. 말하자면, 한번 죽었다가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다만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 옛날의 튼튼한 미싱들이 낮은 가치로 평가되는 점은 못내 안타깝다.

17~18평 남짓한 공간, 미싱들이 전시된 가게 공간을 빼고 나면 단출한 단칸방이 남는다. 가게를 찾은 이의 발을 선뜻 들게 하던, 작지만 온기가 훈훈하던 방. “여기서 애들 셋과 우리 부부, 다섯 명이 살았어요. 어쩌다 장모님이 오시면 여섯 명이 붙어서 잤죠. 그 시절에는 다 그랬어요(웃음)”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공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겼다.

그에게 ‘나의 첫 가게’이자 ‘첫 집’인 이곳은 ‘자신과 아이들을 모두 성장시킨 공간’이다. 그런 흐름에서 그가 전한 한 마디. “요즘 젊은 사람 중에는 일확 천금을 바라거나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은 안 하려고 한다는데, 나는 내가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갈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자부심으로 고됨이나 신물증(지겨움)을 모르고 살았어요. 지금까지도 모든 게 재미져요.”

한번 잘 만들어진 미싱은 쉬이 고장나지 않아 오랜 세월 사용이 가능하다. 장 대표 역시 오랜 세월을 통해 익힌 기술을 현재까지 쓰임 있게 발휘한다. 100년 된 미싱도, 120년 된 미싱도 그를 만난 덕분으로 잘 돌아간다.

[2022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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