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기 150~200년경으로 본다. 그래서 대승경전의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으로 추측한다. 중국으로 들어와 401년 구마라집의 번역 이후로 여러 차례 한역(漢譯)됐지만, 대중에게는 구마라집의 <금강경>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히는 <금강경> 주석서는 조선 초 함허(涵虛) 득통(得通)스님이 정리한 <금강경오가해>다. 여기에서는 1~14장을 상권, 15~32장을 하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금강경>의 14장 초반 혹은 13장까지가 최초의 원형이고, 이후 400년까지 증보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쩌면 원형의 <금강경>을 마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14장에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paramapāramitā를 번역한 것이고, 현장은 ‘최승바라밀다(最勝波羅蜜多)’라고 했다. 무엇을 두고 ‘최고의 바라밀’이라고 했을까? 현장은 <금강경>을 한역하면서 ‘이는 반야바라밀다를 말한다(謂般若波羅蜜多)’고 하여 최고의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에 없는 말을 추가한 것이다.

최근 바라밀다를 ‘완성’으로 풀이해 반야바라밀을 ‘지혜의 완성’으로 풀기도 한다. 그러면 paramapāramitā도 최상의 완성, 궁극의 완성을 뜻하게 될 것이다. 이 풀이에 따라 전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 경을 보고 놀라거나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희유한 사람이다. 그는 제일바라밀, 곧 궁극의 완성을 이룬다. 하지만 궁극의 완성이란, 이름이 궁극의 완성일 뿐이다”가 된다. 그런데 무상(無相)의 진리를 노래하는 <금강경>에서 완성이라는 상(相)을 설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금강경>의 즉비(卽非)는 곧 상즉(相卽)이다. 진공이기에 묘유이고, 부처이기에 중생이다. 부처이기도 하고 중생이기도 한 불보살들이 다만 불지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궁극의 완성은 없을 것이다. 제일바라밀 혹은 최승바라밀다는 피안으로 가려는 불보살이 행하는 바라밀 중 제일 근간이 되고 중요한 반야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미완의 완성을 위한 지혜일 것이다. 

‘궁극의 완성’에 가까운 표현이 불퇴전(不退轉)일 것이다. 불퇴전의 위를 묻는 제자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말한다. “출가위 이상이라야 되나니라. 그러나, 불퇴전에만 오르면 공부심을 놓아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천하의 진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없는지라 불퇴전 위에 오르신 부처님께서도 공부심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어떠한 순역 경계와 천마 외도라도 그 마음을 물러나게 하지 못할지니 이것이 이른바 불퇴전이니라.”(<대종경> 변의품 39장) 끊임없이 일체중생을 위해 마음을 베풀되 어떠한 그림자도 남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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