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동경교당에서 찍은 우메하라 부부의 사진. 우측의 일원상은 요코하마교당 개척 당시에 모셨던 일원상이다.
3월 19일 봉불식이 열릴 현재의 동경교당에서 찍은 우메하라 부부의 사진. 우측의 일원상은 요코하마교당 개척 당시 모셨던 일원상이다.

우리 부부는 원불교 동경교당 교도다. 나는 재일동포 2세로, 결혼 후 아내를 통해 원불교를 만났다.

나의 아내 우메하라 자민은 원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원기53년(1968) 11월 22일 서면교당에서 입교했고, 나는 원기76년(1991) 5월 5일 관동교당에서 입교했다. 학생회 때부터 열심히 원불교 활동을 했던 아내의 신심을 보고 함께 관동교당에 방문한 것이 원불교 생활의 시작이 됐다.

당시 방문한 교당에서 박제권 교무님으로부터 원불교에 대한 자상한 설명을 들었다. 그 당시 법회에는 10여 명의 일본인 남성분들이 있었는데, 법회는 진지하게 교리를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법회에 참석한 일본인들은 나에게 원불교 교리를 자상하게 소개해줬다. 대체로 일본인 남성 교도가 많았고, 재일동포와 한국인도 몇 명 있었다. 교도님들은 주로 일본어로 회화를 하면서 화기로웠다.
 

55년 전 민타원 우메하라 자민 교도가 부산 서면교당 교도일 때 학생회에서 청년회 진급시 받은 소액자, 소교전이다. 일본에 올 때도 소중히 모셔와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55년 전 민타원 우메하라 자민 교도가 부산 서면교당 교도일 때 학생회에서 청년회 진급시 받은 소액자, 소교전이다. 일본에 올 때도 소중히 모셔와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원불교, 생활 속의 실천종교.
이웃들과 우호적 관계 통해
좌선회, 문화모임 등
교당에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 열어가는 게 중요.

아내는 우리 어머니도 원불교로 인도했다. 결혼 후 아내가 원불교를 다닌다고 하니, 어머니는 원불교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아내 몰래 관동교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박제권 교무님을 만난 후 원불교가 좋은 종교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아내에게 교당에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알아보니, 원불교가 참 좋은 종교더라”고 하셨다. “종교가 가정방문 홍보를 왔을 때 교회에서 오면 불교 다닌다고 말하고, 불교에서 오면 교회 다닌다고 하라”며 “원불교만 잘 다녀라”라고도 하셨다. 어머니가 원불교를 좋게 생각하니, 아내는 어머니를 모시고 교당을 다니게 됐다. 어머니는 교당에서 교무님, 교도님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즐기셨다. 교당 행사가 있을 때면 꼭 시루떡을 만들어 공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교화 역사에는 아픈 시간도 있었다. 교당에 교무님이 안 계시던 시절에 우리는 교도님들과 회의실을 빌려 각자 공부한 내용을 발표하며 교리를 놓지 않고 공부심을 키웠다. 그간 공부했던 것을 놓아 버리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 달에 두 번씩 각자 연마한 내용을 작성해 발표하는 식으로 법회를 운영했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참한 심정’이었지만, 우리는 ‘교무님이 안 계셔도 공부를 계속하자’는 마음으로 계속 법회를 봤다. 집에서 경전을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으면 법회 후 간담회를 통해 공부 내용을 나누며 교도들과 친분을 다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원기107년 12월 요코하마교당 마지막 법회이자 결산법회 때 받은 호박엿 목걸이.

교당 봉불식을 앞두고 보니, 지난 시간들이 떠오른다. 예전의 동경교당과 요코하마교당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요코하마교당은 낡은 건물에 집은 기울어져 있었고,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오며 정원의 흙은 흘러내리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곳에 교무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걱정됐다. 낡고 누수된 부분은 수리하고 배수로를 마련하는 등 가능한 한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법회를 보다가 동경교당 매입 이야기가 나왔다. 건축위원회가 구성되고 나니 안심이 됐다.

나는 직접 교당을 찾는 역할은 못 했지만, 관련 물건에 대한 지역 정보를 알아보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답사를 하는 등의 노력을 보탰다. 현재의 교당 건물을 살피고 교도 회의를 통해 매입 결정을 하는 데 참석할 수 있어 기쁘다. 교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건물을 찾는 데 마음과 정성을 합한 덕분에 좋은 교당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너무 행복하고 좋다.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대만족이다.

사실 교무님들이 일본교화를 위해 교도도 적고 시설도 열악한 곳으로 인사발령을 받아 오시는 것 자체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많다. 사령장 하나만을 가지고 모국을 떠나온 교무님들이 일본에서 교화하기 위해 어려운 생활 속에서 공부하고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땐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우리는 그러한 교무님들을 어떻게든 잘 모시려는 마음이 있었다. 혹 1~2년 짧게 근무하고 귀국하시더라도 ‘일본의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기87년 4월28일 대각개교절 기념식 후 자축행사에서 우메하라 가족.
원기 76년 5월 14일 법인백일기도 결제식.

아내는 원불교의 모든 법문을 좋아하는데, 그중 교도로서 특히 솔성요론 1조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를 늘 마음에 담고 교당을 오간다. 일상생활에서는 ‘네덕 내탓’이라는 법문을 표준 삼는다. ‘네가’라고 하면 자꾸 원망만 하게 되지만, ‘내탓’이라고 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원상 서원문을 가장 좋아한다. 그중 특히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라는 부분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또 원불교 교법을 공부하면서 천지·부모·동포·법률 사은의 은혜를 알고 느끼며 감사생활을 하게 됐다. 법률은에 대해 전혀 생각을 못하고 살다가 소태산 대종사께서 ‘사은’ 안에 법률은을 밝혀주셔서 깊은 은혜를 느낀다.

원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교리가 좋다’는 것이다. 생활 속의 실천종교라는 점도 좋다. 이에 바탕해 앞으로 일본에서 원불교는 이웃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역할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회형식에 참석하게 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기회, 즉 좌선회, 문화모임 등 교당에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를 열어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교도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원불교 정신으로 살아가고 실천하며 노력하는 것으로 함께 ‘교화’를 해야 한다. 사회교화를 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한 홍보도 필요하다.

여러 선진님들과 스승님, 그리고 많은 교무님과 교도님들이 기운을 모아주고 경제적으로 합력해주신 덕분으로 동경교당이 훌륭한 법당을 마련하고, 3월 19일에 봉불식을 올리게 됐다. 우리 동경교당 교도들은 마음공부에 더욱 정진하는 것으로 보은하고자 한다.

 

요코하마교당 이사 봉고식에서 기도하는 우메하라 희원, 우메하라 자민 교도.
원기107년 12월 25일 완공된 동경교당 법당.
건물 계약 전 교도들과 내람 시.
3월 19일 봉불식을 앞둔 동경교당 건물에 일원상 간판(이미지)이 달린 모습.
3월 19일 봉불식을 앞둔 동경교당 건물에 일원상 간판(이미지)이 달릴 모습.

*‘지구촌 속 세계교화’는 해외교화 현장의 소식을 현지 교도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매월 1회, 낯설지만 친근하고 익숙하지만 새로운 원불교를 만날 수 있다.

[2023년 1월 16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