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덕 교도
고경덕 교도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이 겨울은 눈이 깊어, 법락 짓는 창 너머 새벽 눈발이 흩날렸다. 낮밤도 모르게 마름하고 수놓다 보면 희부옇게 동이 텄다. 작업대에 해가 들면 금빛 일원상이 반짝거렸다. 금실로 한땀 한땀 꿰기를 2천번, 바늘로 원을 16번 돌아야 일원상 하나가 완성된다. 텅 빈 일원상을 바느질로 채우는 사상선의 시간. 어떤 수(繡)는 전체를 그리기도 하고, 어떤 수는 그 안을 채우기도 하며, 또 어떤 수는 매듭을 향하기도 한다. 한 땀에 참회요, 한 땀에 수행, 한 땀에 보은을 징근다. 세상 하나뿐인 ‘법락 만드는 사람’, 고경덕 교도(무등교당)의 이야기다.

낡은 법락 해체하며 스스로 공부
법의 인증으로 더없이 성스러운 의복, 법락은 누가 만들까. 흔히 인쇄해서 찍어낸 법락이 있고, 사람 손으로 금빛 수를 놓아 만든 법락이 있다. 후자가 바로 고 교도의 것이다. 만들기를 25년째, 그가 빚어낸 법락은 어림 3천개가 넘는다.

“처음에는 수만 놨어요. 일원상만 보내면, 마무리하시는 할머니 교무님이 있으셨죠. 그런데 퇴임하시고 나니 그 뒤로 잇는 분이 없었어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법락은 신성을 수놓고 정성으로 마감한 것이어야 했다. 광주에서 제일 잘한다는 선생을 찾아가 수를 다시 배웠다. 일원상의 징금수는, 임금의 곤룡포에나 들어가는 궁중자수라 배울 데가 드물었다. 

“총부에서 낡은 법락을 하나 얻어왔어요. 조심히 해체하고 다시 만들고를 하며 익혔습니다. 화동침구 시절 생각이 많이 났지요”
 

원기63년(1978) 첫 직장이던 화동침구를 통해 그는 교단에 깃들었다. 취직하고 보니 교무들과 재가 직원들이 정답게 일하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불자수는 꿈도 못 꾸고 미싱자수만 좀 하는 새내기였다. 화동침구에서는 매주 전 직원이 법회를 봤다. 이전까지 성당에 다녔기에 낯설었지만, 어쩐지 좋았다.“그때 일하던 재가 중에 전무출신이 4명이나 나왔어요. 그 중에 최소원 교무님이 있었죠.  많이 따랐는데, 영산 학교에 가시고는 연락이 끊어졌어요. 그래서 찾아갔죠.”

들꽃 같은 그에게 어찌 이런 강단이 있었을까. 그는 서울에서 첫 차로 영광터미널에 도착, 학교가 있다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40여 년 전의 여름날이었다. “학교에 가려면 두 길이 있었는데, 저는 더 험한 선진포 쪽 길을 갔더라고요. 바닷물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울창한 숲을 지나기도 했어요. 깜깜해졌는데도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길래, 그것만 따라갔죠.”

한밤에 기숙사 문을 두드린 하얀 서울 처녀에 귀신 본 듯 얼마나 놀랐을까. 부랴부랴 쉴 곳을 마련해준 학교에서, 그는 몹시 아프고야 말았다. 닷새를 끙끙 앓았고, 그러다 좀 나았고, 어느새 기숙사가 자연스러웠고, 그렇게 한두달을 학생마냥 지냈다. 사감이던 이양신 교무가 간사를 살라며 조실로 데려다줬다.
 

손수 법락 제작 25년, 3천개 넘게 스승님들 목에 걸려
화동침구 직원, 조실 간사로 살며 받든 대산종사 수기법문
남편의 헌신으로 가능했던 일, 공방 마련해 제작 이어가길 

“그래, 앞으로 이런 정신으로 살아라.”
동산 이병은, 장산 황직평 교무가 있었던 시절, 그는 총부 조실과 삼동원과 원평교당 세 군데에 고루 살며 대산종사를 모셨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고 교도의 말에 물기가 어린다.

“신도안에서는 숫제 초가집에 종법사님을 모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납니다. 좁은데 손님이 많이 오니 좌탁이며 방석으로 복잡했죠. 꼭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하셨는데, 눈이 많이 오던 날 돌아오셔서는 ‘소나무가 무겁겠다. 가서 털어줘라’ 하셨지요.”
집 뒤에 헛간이 있었는데, 여러 물건으로 어지러웠다. 그가 정리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대산종사가 산책을 하며 그 앞을 지났다. “뭐하냐” “여기를 치우고 있었어요” “누가 시키더냐” “아뇨, 그냥 제가 했어요.” 그러자 대산종사가 말했다. “그래, 잘한다. 앞으로 이런 정신으로 살아라.” 

없어질 뻔한 법락을 살려낸 것도 그 수기법문 덕일까. 림프종혈액암으로 수술대에 오를 때마다, 그는 “대산종사님, 저를 부탁드립니다”며 생사까지도 다 맡겨 기도했다. 

“전무출신을 못하고 나와서일까요. 내 마음은 가정보다는 이 회상을 향하고 있더라고요. 큰 아이(박은선 웹툰작가)는 ‘엄마는 늘 어딘가를 가야 되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죠. 그런 저를 위해 늘 헌신해주는 남편(박신원 교도)에게도 미안하고 감사해요.”

남편 없이는 못했을 일. 고 교도가 정화제복사에서 천과 금실만 받아오면, 나머지 부자재들은 다 남편이 손수 시장에서 사다준다. 남편이 운영하는 ‘은진기획’  다락방에 아내의 작업실을 만들어주고, 봉고차 뒷칸에 줄줄이 법락을 걸어 말린다. 혹여 구겨질까봐 바람 한자락에도 조심하는 남편의 손길을 사랑, 외에 뭐라 부를까.   
 

딸 박은선 작가는 엄마의 삶을 다큐로 담아냈다.
딸 박은선 작가는 엄마의 삶을 다큐로 담아냈다.

화동침구서부터 약속되어 있던 삶
“이제 눈도 어깨도 손도 좀 어두워졌어요. 제 뒤로도 누군가 이어갔으면 하는데, 교단이 좀 더 관심을 두길 바랍니다.”

법락의 수익이 정화단으로 들어가는 걸 알고, 그는 늘 최저시급 정도로 해왔다. 하지만 다음 사람에겐 제 값을 주면서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복된 일이니, 교도 중에서도 희망자가 있을 거라며 힘주어 말한다.

“우리 교단의 상징이잖아요. 저는 스승님들 목에 걸린 법락을 보며 그 자부심에 삽니다. 아마 화동침구에서 미싱자수를 배운 것부터 제 삶은 법락을 만들기로 약속되어 있었나봐요. 법락이 그렇게 좋고, 또 저밖에 없어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항암치료가 끝난지 반년, 아직 전이는 안 됐지만 불현듯 엄습하는 통증에 밤새 아플 때가 많다. 그래도 금빛 일원상을 위해 매일 가위며 바늘을 잡는 고경덕 교도. 다만 자신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간절함으로 오늘도 법락을 만든다.

딸 박은선 작가가 만든 다큐 ‘엄마와 법락’에서 그는 일원상을 수놓으며 단 두 마디로 법락과의 인생을 돌아본다. “이거 (수) 놓으면 뭐 힘들다가도 싹 없어져. 엄마의 치료약이야.”

딸 박은선 작가가 만든 다큐 ‘엄마와 법락’
딸 박은선 작가가 만든 다큐 ‘엄마와 법락’

[2023년 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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