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시댁 어른의 천도재를 교당에서 지내며 원불교를 알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의 열반으로 천도재를 지낼 때는 원불교가 꼭 ‘죽으러 가는’ 곳 같았다. 허나 시어머니가 열반하기 직전까지 천도법문을 외우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무엇보다 장례를 집에서 지내던 시절임에도 정성껏 준비해주던 교무님들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남편을 따라 나가본 교당. “처음 설법을 듣는데 모든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어요. 그날부터 원불교는 ‘내 종교’가 됐죠.” 박송전 교도(경장교당)는 “원불교를 알게 되고 꼭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젊은 시절 장유착으로 생명조차 위험했던 그는 현 상황에 대한 원망보다 감사를 먼저 떠올렸다. “사은님께서 저를 이렇게 살려주신 것은 남을 더 돕고 살라는 계시가 아닌가 싶었어요.” 병석에서 일어난 그는 교당 봉공회장직을 맡았고 영아원과 보은의 집, 노인복지관을 거쳐 경로식당(무료급식소)까지 봉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정말 사은님의 계시라는 그의 생각이 맞았을까. 그때보다 나이가 들었어도 더 건강한 삶을 살고있다는 그. 박 교도에게 감사생활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힐링 방법이다.

그때부터 35년이 흐른 지금,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무아봉공’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긴 채 밥을 짓고 국을 끓여 경로식당을 찾을 어르신들을 기다린다.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식당에서 먹는 밥이 하루의 처음이자 마지막 끼니인 어르신들이 있어 도저히 이 일을 거를 수 없단다. 

그가 경로식당에 온마음을 담게 된 것은, 빨갛게 언 손으로 매일 밤낮으로 밥을 짓던 어머니에 대한 감사로부터 비롯됐다. 어머니로 시작된 감사가 어머니와 같은 세대를 살며 전쟁을 겪고도 이 나라를 위해 애써온 어르신들에게로 이어진 것. “우리가 그분들 없었으면 이 좋은 세상 경험이나 했겠어요?” 

보은의 의미로 시작된 식당에는 하루 200여 명 넘는 어르신들이 찾아와 그가 준비한 따뜻한 밥 한 끼로 허기를 달랜다. “흘러가는 물만 떠줘도 공(功)인데 내가 움직여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해야죠.”

그는 원불교 감사생활이 “나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라고 했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친구와 함께 해야죠!” 박 교도의 힘찬 외침 뒤로, 벽에 걸린 일원상이 빛나고 있다.

[2023년 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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