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정지아. 그가 32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품 속 무대는 장례식장이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본문 169p) 자리다. 사망자, 즉 장례식장의 ‘손님’은 한때 빨치산이었고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사람으로, 구례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들’을 맞이해야 하는 상주, 아버지의 딸은 장례식장에서 ‘그동안 이해하기는 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와 재회한다. 가슴으로 닿아지는 아련한 만남. 
 

정독한 책을 들고 구례로 향했다. 빨치산 동지였던 부모가 살던 구례 집, 지금은 작가가 홀로된 노모를 모시고 있다. 고양이 네 마리, 큰 개 두 마리도 작가와 함께 산다. 빨치산도, 유물론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구례 촌부와 촌모’의 삶에 대해, 책을 읽으며 밑줄 친 작가의 워딩을 중심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긴 대화였고, 진솔했다.
 

먼지, 인간의 시원(始原)(본문 16p)
(기자·이하 여) 아버지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 나온’ 고급 어휘죠(웃음) 
(작가·이하 정) “인간은 물질로부터 출발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가 특별히 선하고, 누가 악하고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따라 억압하는 자가 되기도 하고, 억압당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쪽으로, 평등한 쪽으로 사회 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 이게 아버지가 생각한 사회주의 유물론의 귀결이었죠. 먼지로부터 시작했으니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할 수 있는 것은 늘 사회 속에서 찾으셨어요. 그것은 결국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본문 27p)
(여) 스스로를 위안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참 아픈 말 이예요.
(정)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면서 자기 신념을 지켜냈고, 그게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주는 고귀함이기도 했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기억 속에 찬란했던 젊음의 순간은, 자기 신념(목숨)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처절했던 고통과 아픔을 견딘 그날이었을 거예요. 
나이가 들어 지나고 보면, 무엇인가 나를 걸고 최선을 다했던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다시 올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도 있을 것이고요.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것
하여,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그가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해방을 묻는다.

사람살이에서 중요한 무엇(본문 32p)
(여) 우리는 ‘아주 중요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사람살이에서 놓치고 있을까요. 
(정) ‘일상의 소중함’ 아닐까요. 밖에서 늘 객관적으로만 평가당하면 얼마나 살기가 피곤하겠어요. 객관적인 아버지의 눈에 저의 외모는 ‘하의 상’이지만, 엄마는 “살이 워디(어디)가 쪘다냐. 내 딸이 제일 이쁘다.”그러시죠.(웃음) 정작 저는 아버지 닮아서 엄마에게 ‘뻥 좀 그만 치시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내 삶을 긍정해주는 누군가와의 일상. 그 일상의 소중함으로 냉정한 생존 경쟁 속에서 싸워갈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본문 33p)
(여) 나의 사정을 너머,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기가 참 어려워요.
(정)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 이었죠.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나니 세상이 아름답더라구요.(웃음)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임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제가 배웠어요. 조금만 사정을 헤아려주고 들여다봐 주면서 ‘부서지지 않고 장하게 살아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 한마디로도 굉장히 달라져요. 내 바닥을 드러내도 나를 떠나지 않는 사람, ‘그래도 괜찮은 관계’의 소중함이 형성되죠.
 

고삐에 묶어놓고 있는 것(본문 41p)
(여)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여 있었던 작품 속 인물(작은아버지)을 보면서, 나를 고삐에 묶어놓고 있는 것은 뭘까 생각해봤어요. 
(정) 저는 오랫동안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에 묶여서 살았던 것 같아요. 나를 밀어내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있었고요. 이를테면 정교수가 되지 못했다거나, 재단 이사장이 대놓고 ‘빨갱이 무서워.’ 이런 경우도 있었고, 어쨌든 빨치산의 딸로서의 한계 같은 것들에 계속 묶여있었던 거죠. 그런데 자신을 묶어놓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인 거 같아요. 이걸 깨닫게 되면 고삐가 좀 느슨해지고, 그 느슨해진 공간 속으로 좋은 사람들이 옆에 오게 되고. 그렇게 좋은 사람들의 힘이 또 나를 좀 더 느슨하게 만들어주는 거죠.
 

마음 둔 것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여) 이 워딩은 꼭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웃음)
(정) 신념이든, 사상이든, 사람이든, 마음에 들였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내가 살았다는 것이예요. 그것을 거둘 때는 자기의 삶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어서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그 자체가 일상이고 삶이죠. 한 사람이 살아왔던 방법, 생각, 추억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체로 누구나 위대한 삶이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고향에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 천지’이고 ‘사람 냄새 넘치는 사람이 그득한’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정지아. 그가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해방을 묻는다. 그리고 추신을 덧붙인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것,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2023년 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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