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꽉 붙잡았지만, 핸들은 자꾸만 왼쪽으로 휙 오른쪽으로 휙 꺾인다. 그렇게 흔들거리며 발을 땅에 뗐다 붙이기를 반복한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더해 외쳐지는 한 마디. “아빠, 절대 놓지마. 절대~!”

하지만 어느 순간 단 두 바퀴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아이를, 아빠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채 바라보고 섰다. 그렇게 아이는 혼자서도 세상을 향해 달리는 법을 터득하고, 부모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한다.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한 사람이 자력을 갖춰가는 성장 스토리와 어쩐지 닮았다.
 

“손으로 주물주물”
자전거를 직접 조립하며 쌓은 노하우는
현재에도 녹슬지 않고 살아있다.


김갑석(법명 갑원·금마교당) 형제자전차 대표는 60년 넘는 시간 동안 자전거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들여다 봐왔다. 100년이 넘었다는 이 공간은, 그가 발 들이기 전부터 이미 자전거포였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세상으로 나아갔겠는가. (이곳의 현재 정식 상호는 삼천리자전거 금마대리점이지만, 본 글에서는 가게의 첫 이름인 ‘형제자전차’로 사용한다.)

형이 시키는 대로
동급생보다 3~4살 위인 나이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봤자 열대여섯 살 남짓. 갓 초등학교를 벗어난 그에게 어느 날 형이 “자전거포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형은 발동기 돌리는 기술이 좋았다. 하지만 일이 워낙 힘들어 동생은 조금 덜 힘든 일을 하길 바랐다. 마침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친구로부터 “동생에게 이 일을 배우게 하면 훨씬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김 대표 삶에 자전거가 들어온 계기다.

그러니 자전거포에 첫발 들이던 때를 그는 그다지 특별하게 회상하지 않는다. 해보니 적성에 맞더냐는 물음에 “당시는 부모님이나 형제가 시키면 당연히 하는 것으로 배웠고, 그래서 했다”고 답한 이유다.

지금이야 자전거가 완제품으로도 나오지만, 당시는 자전거포에서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조립했다. 물론 요즘도 조립식이 있지만, 바퀴살까지 끼우지는 않지 않던가. 그때는 바퀴살은 물론이고, 페달이며 안장까지 부품을 일일이 끼우고 맞춰야 자전거로서 모습을 뽐낼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김 대표는 지금도 웬만한 일반 자전거 수리에 끄떡없다. 이를 그는 ‘손으로 주물주물’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했다.

몇 년 후, 주인이 이사를 가게 됐다면서 “어차피 자전거 기술을 배웠으니 가게를 넘겨 가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형은 밭 서너 마지기를 판 돈으로 자전거포를 인수했다. 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자전거포라서, ‘형제자전차’라고 이름 지었다.

형은 김 대표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자 가게를 물려줬다. 하지만 그는 계속 그 이름을 썼다. 지금도 남아있는, 아마도 당시 간판 대신이었을 유리문에 적힌 ‘형제자전차’라는 글씨가 그 역사를 증명한다.
 

 

100년 된 공간은 발 들이기 전부터 자전거포
바퀴살, 페달, 안장 직접 조립하며 기술 키워
“더도 덜도 아닌, 내게 맞는 욕심 크기 따라”

내게 맞는 욕심 크기 따라
김 대표는 전북 완주시 상관면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익산시 금마면으로 왔다. 이후 금마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토박이나 진배없다. 이곳의 옛 모습을 술술 풀어낼 수 있는 이유다.

그중 한 풍경. 자전거포 길 건너에 터미널이 있었다. 또래들이 멋진 가방을 하나씩 들고 버스에 오르내리는 모습이 눈에 자주 들었고,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양복점이나 이발소처럼 깔끔하고 정갈하게 일하는 모습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자전거를 수리하며 손과 옷에 묻은 까만 기름이 지워질 날 없음’이었다. 괜한 서러움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후회는 않고 살아왔다. “욕심에는 한계가 있어서, 더 부려도 안 되고 덜 부려도 안 되더라. 나에게 맞는 욕심의 크기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에 맞는 욕심 크기를 따라 성실히 살았다. 그랬더니 젊은 날의 언젠가는, 드나들던 자전거 부속 가게 주인이 그를 삼천리자전거 대전지점에 먼저 소개해주기도 했다. 경쟁이 하도 심해 ‘돈을 줘도 대리점 받기가 어렵다’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수월히 대리점 간판을 달았다. 누군가는 욕심을 냈음에도 얻지 못했을, 그런 결과였다.
 

유리 문에 ‘형제자전차’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리 문에 ‘형제자전차’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마 인근에 ‘단 하나’ 남은 자전거포
한때 금마에는 자전거포가 아홉 개까지 있었다. 하지만 형제자전차는 이제, 금마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인 팔봉, 여산, 왕궁을 통틀어 ‘단 하나’ 남은 자전거 가게가 됐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간을 꽉 채우고도 자리가 부족해 천장에 고리를 걸어 자전거를 주렁주렁 매달던 때가 있었지만, 거기에는 이제 자전거 바퀴 몇 개만이 대신 걸려있다.

여기에는 1980년대 들어 1가구 1차량이 본격화되면서 자전거 산업 자체가 사양에 접어든 점과, 인구수가 줄고 더욱이 젊은 인구가 급감하는 지방 농촌 현실이 반영됐다. 이중 두 번째 이유 때문에, 그는 지금의 상황이 못내 안타깝다.

이는 지역에 대한 사랑, 즉 애향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는 주민자치회, 실버자치경찰대, 자율방범대원, 의용소방대장 등의 활동을 통해 봉사로 나누고 있다. “나는 우리 종교가 생활종교라서 좋아요”라는 그의 한 줄짜리 말에 담긴 ‘생활종교’ 네 글자. 어쩌면 그것이 그에게 ‘지역과 함께’를 고민케 하는 근거일지 모른다.

대화 중 김 대표가 “자전거를 맡기는 원인이 같다고 해서 수리 시간까지 똑같은 건 아니다”는 말을 꺼냈다. “관리를 잘 한 자전거라면 수리에 시간이 조금 들지만, 눈·비·바람에 내놓았던 자전거라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순간, ‘마음공부를 해나감도 마치 이와 같지 않은가’ 하는 울림이 지나간다. 

부지런히 관리해야 자전거도, 마음도, 덜 고장 나고 빨리 고쳐진다.
 

가게 바깥에 모여있는 자전거들은 마치 이곳에 켜켜이 쌓인 오랜 세월과 이야기를 담은듯하다.
가게 바깥에 모여있는 자전거들은 마치 이곳에 켜켜이 쌓인 오랜 세월과 이야기를 담은듯하다.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3년 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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