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각교당 김원명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어린시절 엄마 손 잡고 교당 문턱을 넘으며 자란 그는 전무출신을 서원하며 어른이 됐다. 하지만 남존여비였던 세상의 눈에 아버지는 과년한 딸을 등 떠밀듯 시집 보냈다. “그날부터 고난이 하루에도 수십 번 덮쳐왔다”고 김원명 교도(용각교당)는 회고했다.

‘부잣집’이라는 중매쟁이의 말만 믿고 시집온 스물 세 살 새댁의 남편은 당시 약도 없다는 결핵에 걸린 채 골방에 방치되다시피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조건만 있으면 다행이었게요.” 암 말기 시아버지, 늘 술독에 빠져 살며 며느리에게 매질과 욕질을 일삼는 시어머니까지. 경계는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가며 매순간 도사리고 있었다.

“근데 꼭 그이들이 내가 구해줘야 하는 사람들 같더라고요.” 그의 마음에는 좌절이나 원망이 아닌 어릴적 원불교에서 배운 연민과 측은지심이 자리했다. ‘아, 내가 교무가 되지 못한 이유는 이들을 먼저 살리라는 뜻이구나’ 싶었다. 그때는 버스도 없던 시절임에도 매일 김제 시내를 걸어가 약을 받아와서 손수 남편을 간호했다. “원불교를 어릴 때부터 다니거나, 법문을 듣고 자란 사람은 겸허하고 묵묵하게 해나가는 힘이 있어요.” 그리고 그 힘은 남편을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게 했다.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이제는 생활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고, 남편 몫이 모두 다른 형제들에게 돌아갔더라고요.” 그래도 그는 원망보다 감사를 찾았다. 친정 아버지가 주고 간 몫을 성실하게 일구며, 부족한 살림이었지만 김 교도는 어려운 이가 집을 찾아오면 내쫓지 않고 기꺼이 밥상 한 자리를 내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 친구 중에 엄마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애들이 어찌나 눈에 밟히던지….” 하루는 온몸에 이가 있는 아이를 데려와 씻기고, 또 하루는 배고파하는 아이를 불러 밥을 먹였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김 교도를 찾아왔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요’라고 묻길래 ‘너희도 어려운 사람들 도우며 살아라’고 했어요. 그래야 그 아이들도 베푸는 은혜를 배울테니까요.” 억장이 무너지는 세월 속에서도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견고한 가르침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원불교는 복을 쌓아가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 켜켜이 쌓인 50년에는 술에 취한 시어머니가 머리채를 잡으면 불쑥 원망심이 들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욕의 힘을 배우게 한 분이니 ‘저분이 부처님이다’하며 한 고비를 넘었고, 시아버지와 남편을 간호하다 절망을 느낄 땐 ‘가여움과 자비를 알게 하시니 그들이 부처님이다’하며 또 한 고비를 넘었다. “원망이 있어 행복의 가치를 알게되는 것처럼 역경이 없었다면 감사함도 몰랐을 거예요.” 

걱정 없이 마음껏 교당생활하면서 매일 상시일기를 쓸 수 있는 지금이 가장 감사하다고 말하는 김 교도. 그가 마지막 말 대신 ‘붓’이라는 노래 한 자락을 건넨다. 

‘힘겨운 세월을/ 버티고 보니/ 오늘 같은 날도 있구나/ 이리오게/ 고생 많았네.’  

[2023년 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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