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진 교무
오덕진 교무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올해 전산종법사께서 신년법문으로 “강약 진화로 평등 세상 이룹시다”를 밝혀주셨습니다. 

요즘 뉴스에서는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우려합니다. 그리고 경기 침체의 두려움 때문인지 자기 나라만 잘 살면 된다는 정치지도자가 대통령이나 총리로 선출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강자는 계속 강자로 남겠다, 약자는 강자를 이기고 강자가 되겠다는 국가적 의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자기만 강자가 되겠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약자가 강자를 원수로 알고 강자를 이기려고만 하면 세상은 평화와 거리가 멀어집니다. 경제적 이익 때문에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1916년 대각을 이룬 후 최초로 설한 법문 중 하나입니다. <정전>에는 ‘최초법어’라는 제목으로 수신의 요법, 재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 실려 있습니다. 1916년은 지금보다 더 심하게 자기 나라만 잘 살려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상실했으니, 약자 중 약자일 때 소태산 대종사께서 이 법문을 해주신 것입니다.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은 강자를 위한 법문일까요, 약자를 위한 법문일까요?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은 강자를 위한 법문이기도 하고 약자를 위한 법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약자의 위치이니 약자가 강자 이기는 법을 밝혀주셔야 할 것 같은데,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강자와 약자가 모두 진화하는 요긴한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진화(進化)는 나아갈 진(進) 자, 될 화(化) 자를 써서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한다는 뜻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강자도 더 좋아지고 약자도 더 좋아지도록 가르치신 겁니다.

왜 강자, 약자가 모두 진화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나라에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음양 상승의 이치가 세상사의 이치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가족 안에서도 약자가 강자가 되고 강자가 약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기 때문에 자식이 약자이지만, 부모가 나이가 들어 자력을 잃으면 자식에게 의지하게 되니 약자가 됩니다.

강자와 약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어느 때는 강자일 때가 있고 어느 때는 약자일 때도 있으며, 어느 때는 강자가 약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약자가 강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느 한 쪽만을 위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고 못살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하기 때문에 
친할 때도 있고 안 친할 때도 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1919년 3.1운동으로 온 나라가 대한독립 만세로 뜨거울 때 무엇을 하셨을까요? 한 교도가 궁금했는지 정산종사께 여쭙니다. “기미년 만세 운동 때 소태산 대종사께서 시국에 대하여 특별히 하신 말씀은 없었나이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 소리니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 드리자” 하셨다고 합니다. <정산종사법어>제3 국운편 3장 말씀입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은 약자를 강자로만 만드는 공부이기보다는 강자를 영원한 강자로 만들고, 약자를 강자로 만드는 공부입니다. 때문에 한 편만을 들 수 없고 이 공부를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에서 강자와 약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하여 친 불친이 있다”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강자와 약자는 적대적 관계일 것 같은데 강자는 약자에게 의지하고 바탕하고 있고, 약자는 강자에게 의지하고 바탕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기업 총수가 아무리 막강한 부를 가졌더라도 기업 내 사무직 노동자, 생산직 노동자가 다 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기업은 더는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는데 기업이 없다면 경제 소득을 얻을 곳이 없을 겁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면입니다.

그런데 강과 약을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하기 때문에 친 불친, 즉 친할 때도 있고 안 친할 때도 있습니다. <정전> ‘사리 연구의 목적’에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나니”와 같은 뜻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의지하고 바탕하기 때문에 시비 이해의 일이 있기 마련이구나’, ‘친할 때도 있고 안 친할 때도 있구나’ 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하는 공부, 친할 때는 친한 공부, 안 친할 때는 안 친한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친할 때이구나’, ‘다만 안 친할 때이구나’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원래 친하다, 안 친하다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묘하게 친하구나’, ‘묘하게 안 친하구나’가 나뉘는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에 대조해야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자일 때는 강자 공부, 약자일 때는 약자 공부로 실력을 갖춰서 영원한 강자가 돼야겠습니다. 비굴한 것 같아 싫은 마음이 나올 때 그 마음으로 공부하며 배울 건 배워서 실력을 갖추는 원만한 약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빼앗기는 것 같아 아까운 마음이 들더라도 그 마음으로 공부하며 자리이타 법을 써서 약자를 돕는 원만한 강자가 되길 바랍니다.

/대명교당

[2023년 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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