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했더니, 할 일 더 많아져
한국사회가 자치 행정으로 운영된 지 35년이 넘었다. 그래서 면 단위 주민자치 행정도 면사무소와 연계해 자치활동이 이뤄진다.

이 지역사회에 돌아와 정붙이고 보람 있게 살려면 주민 자치위원으로 추천받아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이를 위해 나는 절차에 따라 위원총회에 첫 참석을 하게 됐다. 그날은 마침 위원장을 뽑는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상대로 “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추천이 들어왔다. 다른 후보는 여성이었는데, 인물이 좋고 활동력도 있어 보였다. 후보 추천을 사양하며 “평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위원장을 돕겠다”고 말했다.

주민자치위원이 되면 지역사회를 위해 역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중했다. 주민자치활동에는 주요 심의사항과 기능이 있다. 주요 심의의 내용은 내적으로 교양강좌, 평생교육, 청소년교실 등 문화관련 기능과, 외적으로 자율방제, 마을환경 가꾸기, 건강증진, 알뜰매장, 생활 정보 동아리 관리 등 사회활동 기능으로 크게 나뉜다. 여기서 내적활동 기능은 나의 관심 분야였다. 퇴임 전에 법무부 법사랑 위원으로 역할 하면서 익산시 소재 중·고·대학생 대상으로 30여 년 동안 열심히 해 오던 마음공부와 인성교육 강의를 ‘열린 인문학적’ 차원에서 지속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군 단위에서 지명된 열린 인문학 전문 강사이지만 실제 내 활동의 발판은 결국 면 단위의 여러 기관과 단체다. 이에 농촌 지역사회와 연계해 일하는 데 안성맞춤인 복장을 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 자유로이 헤엄치며 노는 격이 됐다.

 

산서도서관 운영위원장이 되다
장수군 7개 면에는 모두 도서관이 있다. 이에 도서관마다 운영위원장을 둬 책임을 부여한다. 산서도서관에서는 내가 그 일을 맡게 됐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책은 군에서 일괄 구입하고, 도서관은 주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일정한 표본에 의해 운영한다. 그 운영실무 책임자는 프로그램 개발보다 해당 시간의 장소제공이나 참가자 모집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서관 위원장직을 맡고 평생 봐왔던 수천 권의 책을 도서관에 기증코자 책임자에게 연락 했다. 그는 “오래된 책은 안 받고 발간 5년 이내의 책만 된다”고 했다. 해당하는 책만 골라 도서관으로 보낸 후 나머지는 내가 사는 집 헛청의 나무를 꺼내고 아버님이 쓰시던 지게와 같이 병렬해 뒀다. 덕분에 인문학강좌 자료 겸 참고도서로 긴요하다.

지금까지의 인생 낙서장을 이모저모 뒤적여 사용할 것은 사용하고 나머지는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불쏘시개로 썼다.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가 하늘로 잘 피어난다. 이 상황을 시로 써서 ‘실천시’라고 이름 붙이고 <원광문학>에 올렸더니 당선작으로 게재가 됐다. 그 당시 적은 시는 이렇다. 
 

제목 : 굴-뚝
고향집 아궁이에 / 삭다리 꺾어 불지피면 / 기와집 굴뚝연기 / 모락모락 하늘로 솟는다. // 내 삶의 아궁이에 / 낙서장 찢어 불 지피면 / 내 인생 굴뚝연기 / 모락모락 하늘로 피어난다.

 

설맞이 축시 낭독과 달집 태우기 
그동안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족·친지와도 방역 차원에서 거리두기를 지키느라 명절의 정겨운 만남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함께 설 기념 떡국 잔치를 연 것이다. 산서면에는 2,100여 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 노인회와 각 기관장, 단체장들은 150여 명이 된다. 

최훈식 장수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대강당에 모여 설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1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를 했다. 마침 그날 원불교 중앙총부 원로수도원에 계시는 어느 노산(老山) 선진이 미륵산의 일출 광경을 사진으로 보내 주셨다. 우리는 그 햇님을 모시고,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 이장회, 번영회, 청년회, 적십자회 등이 연합해 행사를 주관했다. 

주최 측에서는 행사 전 나에게 축시를 지어 낭송해 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우리 마을에서 면 단위 대표로서 역할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마을은 안도현 시인이 산서고등학교에서 4년 간 교사 생활을 할 때 쓴 시 중 12편을 골라 시비(詩碑)를 세우고 ‘문화가 있는 거리’를 작년에 조성했다. 홍익대 출신 배철호 작가가 판화를 조각하고 구선서 면장이 적극 주선해 이뤄진 일이었다. 

이런 인연의 끈이 이어지면서 우리 마을에는 시인들의 강연회가 열리고, 시작(詩作)을 함께한다. 나 역시 그동안 ‘체험시’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더불어 농사지으면서 얻은 감상들을 시로 써 <원광문학>에 게재해 왔다. 축시 낭송 제안을 받으니 그런 과정이 이제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우리 지역과 관련된 시 ‘무지개 꽃을 피웁니다’를 낭송했다.

설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짚단과 나무를 가져와 달집을 지었다. 함께 지은 달집 위에 휘영청 둥근 달 떠오르자 저마다 소원을 빌고 공동체의 풍년을 염원하는 고사를 올린다. 신명 나는 농악 장단에 맞춰 막걸리를 한 사발씩 건배하며 담소를 나눈다. 이때 서로 부딪치는 술잔 사이로 달님 함박웃음을 띄며 달려와 같이 춤을 춘다.

무지개 꽃을 피웁니다.

팔공산 앞마당에 
아름다운 풍광으로 둘러싸인 산서여!
3·1만세소리 호룡보루 충절탑으로 우뚝 서서 
압계서원이 효행의 가르침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산서여!

저 ~~ 고불텅 고불텅
우리네 인생사 같은 비행기재도 
사람 사람마다에 새겨온 
충, 효, 예 정신 앞으로 달려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네

아 ~~ 평화와 문화가 숨 쉬는 길 따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의 희망으로 검은 토끼가 뛰어나와

토끼풀 꽃 하이얀 봉우리 마다에
산서 지역사회 공동체의 무지개 꽃을 피웁니다.

[2023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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