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가 활성화 되면서 전화 벨소리가 많이 줄었다.

문자 위주의 소통이 서로 간에 부담이 없고 자기 표현에도 자유로움이 있기에, 이젠 기성세대들도 목소리로 통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모양새다. 전화가 일반화되면서 왕래하던 서신이 줄더니,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일상의 전화 통화마저 짧은 문자로 대체되는 현실이 조금 아쉽긴 하다.

“엄마, 돈.” 철없는 아들의 짧은 전화에 부모는 픽 웃고 만다. 그래도 목소리로 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한결 안심이 된다. “너희들 잘 있으면 됐다. 나는 아무 걱정 마라.” 부모의 자비심은 늘 이렇게 철철 흘러넘친다. “전화 한 통화가 그리 어렵냐.” 이런 종류의 불만은 대체로 나이 든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서운함이다. 그래서 어렵게 전화를 걸지만 별 할 말이 없는 부모와 자식은 어색함만 남기고 이내 끊기가 일쑤다. 그래도 어색한 전화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면, 이젠 제법 수다도 떠는 사이가 된다.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 무심하기만 했던 아들 사이에 간격이 좁혀진다.

문득 한밤중에 걸려온 아들의 전화. “사랑해요.” 이 한마디만 남기고 황급히 끊기는 전화.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임을 알지만, 삶의 힘겨움을 참아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기에 부모의 긴 밤은 하얗게 깨어난다. 가끔 누군가의 전화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박카스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자기를 토해 낼 수 있다는 건 상처를 감싸는 붕대가 된다.

사람은 본래 외로운 존재라고 한다. 수많은 대중과 함께 있어도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으니 ‘군중 속의 고독’에 휩싸일 때가 많다. 이는 조직을 이끄는 사람일수록 더하다. 아랫사람이야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지만, 조직을 책임지는 사람은 하소연 할 곳을 찾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고독은 슬럼프로, 우울증으로 번지기도 한다.

긴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왔다. 하소연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쌓였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이 일상인 종교인들에게 그 숨 막힘은 견디기 힘든 고역이 되었다. 신기독(愼其獨), 홀로 있기를 삼가라. 홀로 있음은 흐트러지고 무너지기 좋은 시간들이다. 스승도 동지도 멀리 있으니, 자칫 길을 잃기 쉬운 게 수행자이고 종교인이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누군가의 격려, 이만한 마법은 없다. 서로가 멀리 있으니 전화 한 통으로 안부를 물어주는 게 하루를 일깨우는 보약이 된다. 난데없이 걸려온 종법사의 격려전화, 중앙총부 간부의 안부전화, 교무와 교도의 수다가 어쩜 교화의 새 봄을 재촉하는 단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은 나무도 살리는 게 격려고,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했다. 봄꽃은 화려하나, 춘궁기의 봄이 왔다. 서로서로 격려와 안부로 희망의 봄교화를 일구자.

[2023년 3월 8일자]

키워드

#교화 #봄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