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해 기자
장지해 기자

어릴 적, 외출을 앞둔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에게 꼭 당부를 남겼다.

“엄마와 아빠가 없을 땐 큰언니가 엄마 아빠 대신이야. 언니는 동생들 잘 돌보고, 쌍둥이들은 언니 말 잘 듣고 있어.”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나이. 하지만 부모님께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일 수 없었다. 동생들을 잘 돌보고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다. 말하자면 부모님은 나에게 ‘권한’을 줬고, 나는 그에 따른 ‘책임’을 느낀 것이리라.

하지만 내게 주어진 권한은 때때로 동생들에게 사나움을 부리는 명분이 됐다. 어른들이 하듯 숙제를 가져와 보라고 하거나, 혼을 내기도 하고, 잔소리도 했다. ‘나는 (부모님을 대신할 수도 있는) 언니니까.’ 내게 주어진 권한, 당시의 나는 그것을 그렇게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된 어느 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던 틈에 동생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고작 두 살 차이인데, 그때 언니는 언니라는 이유로 되게 어른인 척했단 말이지.” 동생들은 당시 ‘언니는 언니라는 이유’가 불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어린 나 역시 억울한 면이 있었다. 부모님은 쌍둥이 동생 사이에 투닥거림이 일면 꼭 나까지 불러 함께 혼을 냈다. 때때로 손바닥을 맞아야 할 땐, 항상 ‘두 살 언니’라는 이유로 두 대를 더 맞았다.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뭐 했느냐”는 말에 바로 납득했다. 언니로서의 책임, 그것을 생각하면 그랬다.
언니이기에 부여받은 ‘권한’만큼 언니이기에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 ‘손바닥 두 대 더’로 배운 셈이다.

하물며 자매간 ‘언니’라는 역할에도 이러는데, 어느 역할이 이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한’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책임’이 있다. 내게 어떤 ‘직(역할)’이 주어졌다면, 나는 그 ‘직(역할)’에 해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직(역할)은 주어진 것이니 했고, 그에 대한 책임은 (나는) 지지 않는다.’ 세상에 이처럼 ‘무.책.임’한 마음이 또 어디 있는가. 소태산 대종사께서 말씀하셨다. “성심성의를 다하여 그 책임을 잘 지키는 것이 완전한 일심이요 참다운 공부니….”

우리를, 아니 ‘나’ 자신부터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보자. 내게 주어진 권한만큼 책임도 크게 갖는지, 혹은 권한은 (나에게) 달라고 요구하면서 책임은 (남에게) 미루는 것 아닌지 말이다. ‘권한=책임’즉, 권한과 책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물론 이 당연한 공식도,‘권한도 책임도 남 탓으로 돌리기만 하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하겠지만.

[2023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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