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교전 읽어보기도,
일요법회 미뤄두고 있지만
늘 보은 하고픈 마음.

[원불교신문=류원도 교도] 각타원 장경진 교무님께서 보내주신 회고록을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다. 

읽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 것은 내용 중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교전, 지도, 옥편, 인터넷 등으로 확인해가며 읽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사에 관한 이야기는 <원불교전서>의 교사편을, 길룡리가 어디인지는 지도를, 어려운 한문이나 한시는 옥편과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내가 원불교에 인연을 맺은 것은 부모님을 따라가서였다. 대구경북교구 약사(略史)를 보면 원기39년(1954) 4월 서울지부 교도 고정진, 박효진 발원으로 교당이 창립되고 원기40년(1955) 11월 대구시 삼덕동에 기와집 2층 57평을 매입, 수리하여 교당을 마련한 후 원기41년(1956) 봉불식 거행, 초대교무 항타원 이경순 교무께서 부임하셨다고 한다. 이때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다. 법설시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교탁 바로 앞에 앉아서 교탁 아래 당초(唐草) 무늬 장식조각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남산동에 교당을 차리면서 기와를 날랐던 일, 고교시절 청년회 활동을 했던 시간이 다시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1965년에 입학했으니, 그해에 교무님께서 부임해 오신 것이다. 한창 싱그러운 초임 부교무님으로 말이다. 맞다, 당시 대산종사님께서 요양차 남산동에 오셔서 건너편 사랑채에 계신다고 그 근처에서는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말씀도 있었다. 목련존자 연극도 기억난다.
 

은퇴 후 교전 읽어보기도,
일요법회 미뤄두고 있지만
늘 보은 하고픈 마음.

무엇보다 원불교와의 인연이라고 하자면 항타원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장덕영 어머님은 육신의 어머님이시고, 항타원 선생님은 법 어머님이시다. 여섯 살부터 그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늘 봄바람같이 인자하셨지만 추상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계셔서 연상의 선친도 선생님 앞에서는 늘 어렵게 대하셨다. 

또 대학시험을 얼마 앞두었을 때 졸업반 남녀학생들을 동성로에 있는 유명한 만두집에 데려가셨다. 맛있는 만두를 사 주시면서 대학입시에 임하는 자세를 일러 주셨는데 바로 ‘영주를 암송하라’는 말씀이었다. 실제로 입시 고사장에서 시험지를 받아놓고 시작 벨이 울릴 때까지 마음속으로 ‘천지영기 아심정…’을 계속 외웠던 덕분에 평정한 마음으로 시험을 마치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대학 생활, 군 복무,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교당에 나가지 않다가 군 복무를 부산에서 하면서 부산교당으로 항타원 선생님께 인사 갔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뵌 항타원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성인이 되어 집 근처 반포교당과 흑석동 교당에 몇 번 나갔지만 어쩐지 항타원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내 교당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은퇴 후 교전을 읽어 보기도 하지만, 건강을 위한 일정으로 아직 일요일 법회는 미뤄두고 있다. 그러나늘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가지고 있다. 언젠가 찾아뵙기를 희망하면서 우선 회고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각타원님, 평생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 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