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교당 최대법화 교도
음성교당 최대법화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그가 원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일원상이 검은색이던 시절’이라고 했다.

“이사 온 낯선 곳에서 교무님 한 분을 만났어요.” 검정색 치마에 눈부시도록 흰 저고리, 그리고 정갈한 검은색 구두. “그 모습이 어찌나 멋져보이던지, 아마 나도 전생에 교무님이었을까요?” 동네에서 교무님을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 거렸지만 선뜻 교당 갈 마음은 내지 못했다. 그랬던 그를 교당으로 이끈 것은 아들이었다. “아들은 동네에서 교무님이 지나가면 다가가서 손을 붙잡고 정을 냈어요. 그러다 어느날 제게 ‘엄마, 우리도 교당가자’고 했죠.” 그렇게 처음 간 교당에서 만난 일원상. “저게 부처고, 인과라고 하니 허무하다가도 ‘그 허무함이 곧 진리구나’를 알겠더라고요.” 최대법화 교도(음성교당)는 그날 본 검은색 일원상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처음 간 교당이지만 교무님께 밥이라도 해드리고 싶어 쌀독을 열었다. 그런데 독은 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최 교도는 그날부터 밥 때만 되면 교당으로 아들을 보냈다. 교무님의 치맛자락 붙잡고 보채는 아들의 손에 끌려 서위진 교무는 그의 집으로 왔다. “밥 같이 먹으면 그게 식구죠.” 그렇게 그들은 ‘식구’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큰 경계가 그를 덮쳤다. 그에게 자궁암 판정이 내려진 것. “허망함에 아이들을 안고 울고 있는데 교무님이 우리집까지 와서 제 손을 잡아끌었죠.” 그의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부터 살려야지’ 하며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챙겨 왔던 교무님 그 길로 최 교도를 전남대병원에 데리고 갔다.

처음 가 본 낯선 곳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당시 광주교구장을 포함한 병원 근처 교당 교도들이 달려와준 것이다. “참, 원불교 사람들은 어딜가나 티가 나요.” 일면식 없는 그를 위해 모두가 ‘내 가족’처럼 병수발을 자처했다.

“그렇게해서 저를 살려놨는데 내가 허투루 살면 되나요.” 최 교도는 그날부터 원불교에 자신의 삶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마음은 한결같아서, 현재 그는 교무를 아들로 여기는 것은 물론 교당냉장고 가득 반찬을 채우고 마당에는 흐드러지게 꽃을 가꾼다.

“교무님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보은이 될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죠.” 내생에는 전무출신을 서원하며 그는 부지런히 복을 쌓는다고 했다. 최 교도가 가슴 속에 간직한 일원상은 처음 본 그날의 것처럼 여전히 빛을 낸다.

[2023년 3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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