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갈탄 화로 속에서 새빨갛게 달궈진 참이다. 덕분에 유연해진 쇳덩이 한 조각, 화로에서 꺼내어져 모루에 올라가더니 대장장이의 손에 들린 망치로 여러 번 두들겨진다. 몇 번의 망치질이 지났을까. 어느새 붉은 열기를 삭힌 쇳덩이는 익숙한 호미 머리를 보여준다. 

단련(鍛鍊)이라는 단어의 비롯은 필시 대장간일 것이다. 애초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강하게 만든다는 뜻이니. 그렇게 매우 뜨겁게 달궈지고, 한껏 두들겨 맞고,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나야 비로소 쇠는 어엿한 ‘세상의 쓸모’가 된다.

그러고 보면 대장간 속 풍경은 사람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 경계에 두들겨 맞기도 하고, 불에 덴 것처럼 아파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성숙하는 게 말이다. 게다가 쇠가 제아무리 단단한들, 100년을 넘긴 노하우 앞에서 장사 있겠는가. 3대째 가업을 잇는 류성배 연산대장간 대표의 손에서는 오늘도 몇백 개의 ‘쓸모’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대장장이는 사신(四神) 다루는 직업
“작년에 썼던 호미가 안 보여.” 

대장간을 찾은 한 어르신이 말한다. 참 희한한 일이다. 분명 지난해에 쓰고 잘 뒀는데, 왜 올해가 되어서는 보이지 않을까. 덕분에 대장간은 늘 봄의 시작을 조금 빨리 알아차린다. 겨우내 얼었다 녹은 땅으로 다시 향할 농부라면, 한 번은 꼭 대장간에 들르기 때문이다. 이날도 대장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다.

연산대장간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빨간 불길을 내는 갈탄 화로다. 전국에 남아있는 대장간도 몇 곳 안 되거니와, 대장간이라 할지라도 전기화로를 쓰는 데가 많아서다. 화로 속 잔잔해 보이는 불길의 온도는 최대 2,000℃까지 오른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문을 여니, 화로 역시 매일 불을 품는 셈이다. 여름엔 어떻게 견딜까 싶다.

류 대표는 “대장장이는 사신(四神)을 다루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쇠, 불, 물, 그리고 나무까지 다룰 줄 알아야 칼도 농기구도 만들 수 있어서다. 하지만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1년에 네 번 꼭 고사를 지내는데, 그는 이를 “같이 일을 잘 해달라고, 기계들과 소통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연산대장간의 스테디셀러가 궁금했다. 류 대표는 ‘벽채호미와 선호미’를 꼽았다. 다마스커스 칼(두 종류 이상의 철을 달구고 두드리며 접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독특한 무늬를 띤다. 여러 번 접어 단조하므로 단단하다)을 구경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대장간은 봄이 옴을 빨리 안다. 농기구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대장간은 봄이 옴을 빨리 안다. 농기구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3대째 잇는 대장간 역사
할아버지(류영찬)는 본래 황해도 출신이다. 어쩌다 신도안까지 내려와 대장간을 열고 37년여간 대장장이로 살았다. 이북에서도 대장간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는 탓에, 류 대표는 연산대장간의 시작을 할아버지가 신도안에서 대장간 문을 연 때로 본다.

아버지(류오랑)는 열두 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니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대장장이 삶은 70여 년에 달한다. 지금의 대장간은 아버지가 둘째 큰아버지로부터 1977년에 넘겨받았는데, 신도안에서 대장간을 옮겨올 때 아버지는 기계만 옮겨주고 이 일을 더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루에 걸터앉아 매질과 담금질을 보며 자란 탓인지, 아니면 이 일을 계속 해서인지, ‘쉬니까 몸이 슬슬 가렵다’며 매일 대장간으로 출근했다.

아들인 류 대표는 자신의 경력을 나이와 비스무리 하게 삼는다. “대장간 일은 보고 자란 것부터 경력으로 쳐야 한다”는 너스레를 통해서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 건 10년이 조금 더 됐다. 2011년 아버지가 식도암으로 큰 수술을 받게 되자 큰 형(류성일, 현재 경남 산청에서 대장간 운영)이 먼저 발을 들였고, 막내인 류 대표에게 ‘이 일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잠깐의 고민은 있었지만, 결정은 쉬웠다. 요즘에 와서 류 대표는 이를 ‘신의 한 수’라 여긴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더 일찍 시작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건 큰 보람으로 와닿았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아버지의 고단함을 백분 이해하게 됐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 형제로 이어진 100년. 최근, 여기에 더해질 시간에 대한 기대가 추가됐다. 조카(둘째 형 아들)가 이 일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가업이 3대에서 4대로 이어질 수 있음이, 류 대표는 못내 기쁘다. 아마 여러 대장간들의 역사 중 유일하지 않을까.
 

갈탄 화로는 거의 매일 불을 품는다. 여름에도 여지 없다.
갈탄 화로는 거의 매일 불을 품는다. 여름에도 여지 없다.
호미의 경우 하루에만 300~400개가 태어난다. 
호미의 경우 하루에만 300~400개가 태어난다. 

불편함 없고 예쁘게
대장장이의 삶을 갓 시작한 때는 주문 제작 건이 들어오면 견적도, 시간도, 이미지도 가늠을 못 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주문을 받으면 화장실로 달려가 어떻게 만들지, 이렇게 때리면 될지 등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해 그렸다.

그의 기준에 물건은 ‘사용에도 불편함이 없고 미적으로도 예쁘게’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니 어떤 물건이든 한번 만들어진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갈고 더 두드려내기를 여러 번. 덕분에 그는 이제 어떤 주문도 다 소화할 수 있다. 그 역시 ‘단련’된 것이다.

류 대표와 함께 연산대장간 살림을 하는 어머니 이현숙 씨는 “사실 자녀들에게 이 일을 안 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스무 살에 시집와 꼬박 60년 동안 겪었으니, 이 일의 힘듦과 고됨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업을 잇겠다”며 스스로 나서는 세 아들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고생이 안타깝기는 여전하지만, 역사가 3대와 4대로 이어짐은 한편 큰 자랑이다.

류 대표의 표정과 목소리는 ‘대장장이로서의 자부심’ 그대로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터전, 그는 “그 바탕이 있어 지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뒷세대로서 잘 뒷받침해야겠다’는 다짐을 수시로 한다.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좇아 오게.’ 그의 말에서 ‘돈보다도, 세상에 오랜 역사를 가진 대장간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그곳에서 세상의 쓸모를 만들어낸다’는 기쁨이 와닿는다. “재밌어요. 물건이 이렇게 많이 걸려있어도 한 번만 훑으면 빠진 게 보이는데, 아마 주인(주인의 마음)이라서겠죠.”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3년 3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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