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선 교도
주교선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올해 나이 88세. 아침에 일어나면 좌선과 기도로 마음을 정돈한다. 오늘은 50여 년 마음공부 해온 세월에 담긴 이야기를 취재하러 기자가 온다고 한 날.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기도를 올린다. 오늘따라 그의 기도가 길다. 

주교선 교도(중흥교당)의 기도에는 종소리에 이끌려 교당에 갔던 순수했던 신심과, 지금은 어엿한 동광주교당이 된 당시 계림교당에서의 열렬했던 공심과, 오늘날 빼곡하게 법문 말씀을 옮겨적는 꾸준한 공부심까지 담겨있다. 그의 가슴 속에 자부심이 피어난다.

“매일 종소리 들으러 오너라”
“연원이 누구예요?” 원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질문. 주 교도는 이 질문에 늘 “종소리”라고 답한다. 

교사로 근무하던 남편의 발령을 따라 영광으로 이사 온 그. 새벽이면 늘 뒷 숲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종소리가 났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갔던 절에서 듣던 종소리 같은데, 무어라 말 할 수 없이 좋더라고요.” 자연스레 소리를 따라 숲에 가보게 된 그. 그곳에는 두 팔로도 안을 수 없이 큰 소나무 옆에 종각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종을 보자마자 두 손이 모아져 합장이 되더라고요.” 

주 교도가 그 자리에 서서 종을 바라보며 한참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 종 옆 작은 집에서 쪽진 머리의 한 사람이 나왔다. “‘누가 왔노’ 하시길래 ‘종소리가 좋아서 종 보러 왔습니다’ 했더니 그분이 ‘종소리 따라 왔나, 부처님이 왔네’ 하셨어요.” 지금은 열반한 당시 군남교당의 심익순 교무는 “매일 종소리 들으러 오너라” 덧붙였다. 그 한 말씀에 50여 년 동안 교당에 출석도장을 찍었다.
 

50여 년 동안 교당 친정집으로 여기며 지켜온 신심
두 교당의 창립주, 그 힘은 ‘공부인’으로서의 자부심
조석심고·좌선·사경 매일 거르지 않는 꾸준한 공부심

주 교도가 자신의 사경노트를 이안성 교무에게 보여주고 있다.
주 교도가 자신의 사경노트를 이안성 교무에게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딸처럼, 때로는 언니처럼
젊었을 때 남편은 입버릇처럼 그에게 말했다. “너는 다 좋은데 애를 못 낳으니 왕병신이다.” 그말이 어찌나 가슴에 박혔는지 겪어보지 않았다면 모를 설움이었다. 남편은 심 교무를 모신 식사자리에서도 그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늘 너그럽던 심 교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교무님께서 ‘왜 교선이가 왕병신이야!’ 하고 역정을 내셨어요. 꼭 친정어머니처럼요.” 아이를 못 낳는 죄에 무어라 되받아 칠 새 없이 받아왔던 오랜 설움이 한꺼번에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심 교무는 그의 손을 잡더니 “교선아, 저런 말 듣고 살지 말자. 우리 기도하자”며 그날부터 매일 그와 기도를 했다. 기도의 위력이었을까. “꿈에 교무님이 우리집에 큰 보따리 하나를 들고 오셨기에 풀어보니 사내아이가 있더라고요. 그게 지금 우리 아들 태몽이었지요.” 그렇게 교무들은 주 교도의 인생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었다. 

몇 년이 흘러 계림교당(현 동광주교당)에서도 그랬다. “군남교당과 서광주교당에서 배운 것을 바탕삼아 계림교당을 교무님 도와 일으켜보자고 했죠.” 허나 당시의 계림교당은 기차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작은 방에 고무대야 하나와 솥 하나만 달랑 있는 소박한 교당이었다. 

그래도 주 교도는 굳건하게 친정언니처럼 이현봉 교무를 도와 매월 관공서, 학교, 회사 등으로 순교를 나섰다. 그의 노력과 여러 기도의 합심 덕분에 계림교당은 지금의 동광주교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사를 가고, 집을 사고, 법당을 만들고… 교당이 커지는 게 우리 친정집 넓히는 것처럼 행복했어요.” 지금도 봉불식 하던 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다.
 

경계에서 부처 찾는 원불교 공부
30여 년이 지나던 즈음, 그에게 큰 경계가 찾아왔다. 딸처럼 아끼던 며느리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 것. 큰 경계에 원망심이 날 법도 하건만 그는 ‘이것도 내 인과인데 내가 달게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며느리가 열반하고 보니 그의 눈에 6살, 3살 된 손자녀가 들어왔다. “아, 사은님이 ‘가정에서 이 아이들에게 인과를 알려주라 하시는구나’ 싶었어요.” 주 교도는 엄마처럼 손자녀의 뒤에서 엄마의 빈자리를 원불교 가르침으로 채워주려 부단히 애썼다. 그렇게 아이들은 할머니의 품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일찍 인과를 배웠다. 아이들은 ‘할머니 행동을 따라서 했을 뿐’이라 표현했고, 그는 ‘경계에서 부처를 찾는 원불교 공부를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열반하신 교무님들께서 “‘교선아 내생에 전무출신으로 꼭 다시 만나자’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 약속 지키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복 쌓아야죠.” 

원불교는 앞으로 세계에 뻗쳐나갈 종교라고 확신한다. 그 확신 속에서 한 줌 보탬되는 전무출신으로 다시 태어날 서원을 세운다. 그 서원은 그를 원불교로 이끈 그때의 종소리보다 더 청명한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수 십년 동안 매일 사경과 좌선을 해오고 있다. 
그는 수 십년 동안 매일 사경과 좌선을 해오고 있다. 

[2023년 3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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