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관 교도
여도관 교도

[원불교신문=여도관 교도]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한 드라마가 또다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기생충>, <오징어게임>에 이어 <더 글로리>의 열풍은 K-콘텐츠가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함인지 흥행을 위해 사회적 치부를 이용하는 것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드라마의 성공에는 탄탄한 시나리오, 출연 배우들의 열연, 쉴 틈 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연출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는 선명한 주제 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사회문제가 있지만 학교폭력 문제는 내가 당사자이거나 가까운 친지나 이웃 중에 한 명쯤은 피해자가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만성화된, 심각한 사회문제다. 학교폭력 사건은 잊힐만하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유명인이 저질렀던 학창시절의 폭력, 왕따, 비행은 ‘미투(Me Too)’라는 사회적 고백으로 폭로된다.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자신의 행동이 끼칠 결과를 예측하거나 자신이 벌인 사건을 평가하는 데 미숙하다. 많은 청소년 행동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위험성보다 행위에 뒤따르는 만족감을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적인 행동을 과감하게 저지른다. 

도전을 통한 성취감이 성숙한 어른으로 커가는 밑거름이지만 잘못된 행동을 선택했을 때에도 만족감이 윤리적 죄의식을 덮어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의 인격을 살해하고 있다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행동을 쉽게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받았어”라는 대사나 “너네 혹시 고등학교 때 기억나? 우리가 걔한테 어떻게 했지?”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너진 약자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그동안 주위에서 많은 학교폭력 피해자들을 봤지만 피해자만큼 존재해야 할 가해자를 접한 적은 없다. 그들이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목격할 수 없는 것일까? 피해자들이 대인기피증에 걸리거나 사회부적응자로 망가져도 가해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를 용서하고 생활기록부마저 법을 악용해 세탁하며 ‘보통의 일상’을 누리고 있기에,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미국 <타임>지는 <더 글로리> 열풍을 다룬 기사에서 “학교폭력과 (재력이나 권력 같은) 사회적 불평등 사이에는 결정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학교폭력 미투방식은 개인 차원의 과거사 청산 투쟁이다. 과거 청산의 핵심은 단죄가 아니다. 부정한 폭력에 대한 진실규명과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다.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인터뷰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되찾아지는 것은 결국 폭력을 당할 당시 상실한 인간적 존엄, 명예, 영광이다”며 과거의 해원만이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임을 통찰했다.

연약해 상처받기 쉬운 청소년기의 뇌가 장기적으로 따돌림이나 폭언, 폭력에 노출되면 심각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는다. 흔히 PTSD라고 하면 참전군인 혹은 참사의 생존자만 떠올린다. 맞다. 학교폭력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은 베트남 정글을 헤매는 병사이고, 무너진 건물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생존자와 같다. 이들이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약한 여성이 참혹한 환경을 극복해가며 같은 처지의 약자들과 연대해 권력과 부를 겸비한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 

한 개인에게 닥쳤지만 당사자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문제’라 부르며, 그것의 해결은 국가와 사회의 몫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무너진 약자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한국방송협회 기획심의부장ㆍ강남교당

[2023년 4월 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